인체생리학과 약초에 대한 전문지식관련 책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는 좁은 사무공간 안에 낡은 테이블을 두고 그리만과 진 소공작이 서로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폭포수가 아무런 반응을 안 하더군.”
“이상하네요... 머리 색깔 말고는 성격이나 외모가 일리아님이랑 판박이입니다.”
“뭐... 나는 고모를 초상화로만 보았지만 닮긴 했더군. 하지만 드라코 의식을 하지 못하는 한 아르디안의 후손이라 할 수 없어.”
“참, 지금 마을에서는 드라코 의식 이야기밖에 안하고 있어요. 이번 환각 사태가 피해규모는 크진 않았지만 레이크 쉐이든 마을 주민들 전체가 동요하기에 충분히 충격적이었거든요.”
“그렇지. 공작님이 드라코 의식에 마을 대표들을 데려가신 건 탁월한 선택이다 싶어.”
“소공작님 아이디어라 들었습니다. 덕분에 귀족들 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도 아직 아르디안이 드래곤의 보호아래 있다고 믿는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좀 진정된 거 같구요.”
“하... 이번엔 귀족차례인가. 지긋지긋하군. 공작님은 이번 시릴 성 무도회에는 근처도 가시지 않겠다 엄포를 놓으셨어.”
“드라코 때 그렇게 안 좋았습니까?”
진은 혀를 내두르고는 다리를 꼬며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말도 마. 하나같이 이해관계에 빠져서는 이번기회에 뭐 하나라도 더 건져내가려고 달려들었다던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밖에서 헤이든이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가뜩이나 가난한 공작저 더 털리게 생겼네.”
저벅저벅 들어오더니 소공작 맞은편에 털썩 안으며 건방진 자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똑바로 안 앉아?”
헤이든의 버릇없음에 식겁한 그리만이 발을 툭 차며 경고했다.
“왜요? 저 사람은 납치범입니다.”
“보았나? 그리만. 내가 이런 대접을 받고 산다네.”
“제가 아들을 잘 못 키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노려보는 그리만에게 어깨를 으쓱 내보이던 헤이든에게 진이 말을 건네었다.
“백작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고? 그거하난 잘했네.”
“소공작님께 잘 보이려 그런 거 아닙니다.”
“내가 부탁한 거 잊지 마.”
“저 바빠요. 잘못커서 일을 잘 못하지 말입니다.”
“뭐가 또 수가 틀린 거야? 넌 어렸을 때부터 너무 감정적이야. 공과 사는 구분 지어야지.”
그 말에 헤이든이 울컥해 몸을 벌떡 일으켜 핏대를 세웠다.
“어떻게 자던 아이를 그렇게 데려갈 수 있단 말입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네. 그리고 제가 감정적이라구요? 그날 형님 그러고 가시곤 산타하 백작, 삼일동안 침대에서 나오질 못하고 있다구요.”
“디아나를 데려간 건 마법사라 이야기 했을 텐데. 그리고 백작은 걱정 마. 시릴 성 무도회 때 백작 속 한번 더 뒤집어 놓을 테니 기대하라고.”
“이 시국에 무도회를 즐긴다라. 퍽 귀족답네요.”
“그들은 사교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니 어쩔 수 없어. 달래주어야 또 얻어낼 게 있으니. 대장이 가져온 자료 보니 아주 지들끼리 엄청나게 해쳐먹었더군.”
마을 중앙에 위치한 시릴 성은 산타하의 전반적인 업무를 집행하는 행정관청으로 아르디안의 중심사업인 곡물상길드연합도 그곳에 모여 있다.
아르디안 선대가주가 비옥한 토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아르디안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을 산타하로 취합했다.
그것들을 곡물상 길드연합에서 가격을 책정해 레이크쉐이든으로 보내며 제국 전체로 수출을 하여 큰 수익을 만들었다.
이것이 날로 번창하면서 아르디안 공작령은 제국의 곡창지대로 자리 매겼다.
이때 길드연합에 투자한 8인의 상인들이 투표권을 나누어 가지며 남작위를 수여받았다.
산타하의 규모가 날로 커질수록 그 투표권이 산타하의 법적관할권과도 같아져 법을 제정하는데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테스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그제까지 공작저 고문실에 있다가 리드버로 보내버렸어. 남작 8인 중 듀켈 편 2명을 알아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아르디안의 주요 수입원인 곡물상거래의 방향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길드연합은 11개의 투표권으로 의견을 통합했는데 수장인 아르디안 가주가 2표를 가졌고 백작을 포함한 9인이 1표씩 나누어 가져 사안을 결정지었다.
남작들도 가진 재산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달랐기에 아르디안 가주가 사안마다 적절히 남작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테스의 서신들을 통해 11표 중 백작을 포함하여 3표가 아르디안의 배신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배신세력을 따르는 다른 남작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졌다.
“찾아낸 증거만으로도 바로 남작들 끌어내릴 수 있을 텐데 왜 두고 보시는 거죠?”
“만약에 과반수 이상이 산타하의 보안을 핑계로 듀켈 군의 주둔을 허가한다면 아르디안의 군사전략 상 큰 구멍이 생길 수 있어요.”
소보에 부자의 말에 진이 느릿하게 찻잔을 들어 마시며 대답했다.
“... 듀켈이 산타하에 접근하는 이유가 단지 아르디안을 견제하려는 이유만이 아닌 거 같아서.”
“황제의 계략이 숨어있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리만의 말과 동시에 지안이 방문을 열어 고갯짓하자 진이 일어서 자켓의 앞섶을 잡아 매무새를 고치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기고만장한 남작들 투표권을 몰수해서 공작가의 기반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계속 해쳐먹게 냅두고 경로를 따라가 봐야 해. 그러니 백작 동태 잘 파악해. 곧 백작저에서 보자, 헤이든.”
***
산타하는 아르디안 유통망의 중심에 있기에 인지도도 높았고 부유했다.
그렇기에 아르디안 공작령 내의 사교계에서만큼은 산타하 백작영애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런 그녀가 투병생활로 잠적했다 복귀하는 이번 무도회에 얼마나 열의를 쏟을 지는 자명하다.
“주문하신 드레스가 왔어요. 이 민트색 너무 예뻐요. 아가씨 피부 톤에 딱 어울려요.”
수도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듀라모 왕국의 자수벨벳 원단의 드레스를 벌써 4번째 받아든 유스티나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귀금속들을 머리, 귀, 목에 건 채로 드레스를 관찰했다.
“라리갈리마 이후로 피부 톤이 확실히 어두워졌어. 이거 입으면 내가 너무 칙칙해 보이지 않을까?”
“전혀요. 훨씬 매력적으로 보여요. 이것도 너무 좋은데요? 짙은 푸른 계열의 원단이 참 잘 나왔어요.”
앨리스가 오늘 입고 갈 드레스를 고르는 유스티나 앞으로 다른 드레스를 가지고 온다.
“소공작님께선 언제 출발하신데?”
“집사님 말씀으론 시릴 성에서 업무를 보고 계셔서 무도회장으로 바로 가실 것 같다네요. 엘레나 영애께서는 언제 오실까요?”
“걔는 무도회는 귀찮다고 내일 오겠대. 디아나는?”
“지금 욕실청소 끝내고 쓰레기 비우러갔으니 곧 올 거예요.”
“너랑 디아나 데려 갈 거니까 채비해. 그 년에게 무도회에서 저와 나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줘야겠어. 설마 소공작님이 걔가 마음에 들어서 그랬겠니. 그치?”
“그래도 조심하세요. 그 불여시같은 계집애가 남자를 어떻게 유혹할지 누가 알겠어요. 무도회가서 제가 잘 감시할게요.”
“소공작님을 만나야 유혹을 하네마네 하지, 마르켈 오라버니도 얼굴 코빼기 안 내비치시는구나.”
“무도회 끝나면 아마 여유가 생길 테니 노여워마세요. 얼른 준비하셔야 해요. 늦으시겠어요.”
우여곡절 끝에 무도회장에 도착한 유스티나 일행은 시작 시간보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연회장으로 입장하였다. 주목받기 위해선 조금 늦게 들어 가야한다는 백작영애의 지론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가 들어가자 역시나, 길드연합 가문의 남작영애들과 아르디안 공작령의 영식들이 우르르 그녀에게로 다가와 인사를 하느라 북적였다.
디아나는 눈치껏 그녀에게서 멀어져 벽 한쪽에 기대어 섰다.
오늘 처음으로 한숨 돌리는 것이었다.
“전생과 현생의 차이가 이리 극명할 줄이야...”
지나가는 웨이터의 시원한 얼음물들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킨 디아나가 힐끔 주변을 살피자 앨리스가 옆에서 시퍼렇게 눈을 뜨고 감시하고 있었다.
전생에서는 자신이 모든 이들의 중심이 되어 휘두르고 다니느라 저 진귀한 음식들은 관심도 없었는데 얼음물 하나가 이리도 절실하다.
그때 마르켈의 시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앨리스. 마르켈 소백작 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네? 도련님께서요? 저를 왜요?”
그는 더 이상의 대답 하지 않고 뒤돌아 걸음을 옮겼고 앨리스가 그의 뒤를 황급히 쫓아갔다.
디아나는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얼음물을 찾으려 움직이려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왜 이리 늦었습니까?”
언제 다가왔는지 소공작이 그녀의 옆에 서서 정면을 주시한 채 물었다.
귀신 보는 듯 놀란 디아나가 반갑지 않은 알은체에 못들은 척 다급히 그에게 벗어나려했다.
“어디가십니까?”
그가 디아나의 팔을 붙들었다.
“앨리스를 따라 가야해요.”
“시릴 성 관광을 원하십니까?”
“네?”
“제가 마르켈 시중한테 앨리스 좀 쫓아내라고 시켰거든요.”
앨리스가 옆에 없는 건 좋았으나 소공작이 곁에 있는 건 더 싫었던 디아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유스티나 아가씨는 저기 계세요.”
“디아나 양을 기다렸습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저도 무도회를 좀 즐겨야하지 않겠습니까. 재미없어서 돌아버리겠군.”
“보통 귀족들은 무도회를 즐거워하지 않나요?”
“전 귀족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엑소더스랑 다니는 게 더 재밌습니다.”
진이 지나가던 웨이터를 멈춰 세워 그의 쟁반에서 음료를 집어다가 디아나에게 건넸다.
그토록 원했던 음료를 손안에 넣자 아까까지 그녀에게 씌워져있던 못된 얼굴은 사라지고 천사 같은 미소와 함께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상큼한 레몬 향을 머금은 레몬에이드가 정신을 확 들게 해주어 무척이나 행복해졌다.
그런 디아나를 보고 있던 진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뒷짐을 지더니 시선을 고쳐 앞을 바라보았다.
“근데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저한테 왜 경어를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