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앞에 있는 상자가 쓰러져 있는지도 모르고 부딪히려는 걸 헤이든이 잡은 것이다.
“야! 정신 차려. 다칠 뻔했잖아.”
“세상에.. 마을이 너무 예쁘다.”
“여기가 호수를 끼고 있어서 그래.
여긴 귀족들만 다니는 곳이야.
우리 집은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해.”
그는 굉장히 익숙하다는 듯 골목을 요리조리를 헤쳐 나갔다.
구경하느라 정신 팔려 있던 디아나는 한참 후에나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걷고 있던 사실을 알아냈다.
마치 연인 같아 보여 디아나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다.
“뭐,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빨리 걷는 거야? 천천히 가.”
“안 돼.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야 해. 오늘 점심도 너무 일찍 먹었잖아. 배고프지 않아?”
“알았어. 쫓아갈 테니 우선 이 손 좀 놔.”
디아나가 자신의 손을 빼내려 하자 헤이든은 그녀의 팔을 잡아 끌어 자기 팔에 바싹 끼고는 손을 더 꼭 쥐었다.
“그렇게 구경하다가는 나 잃어버려서 울고 넘어져 코 깨진다.
골목으로 들어 갈수록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아귀힘이 그렇게 센지 손을 뺄 엄두가 안 났다.
이젠 동네고 뭐고 잡힌 손에만 온 신경이 쏠려 한참을 가는데 그의 발걸음이 뚝 멈추어 손을 놓아주었다.
그곳엔 ‘소보에’라는 간판이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 여기가 소보에구나?”
“응. 다왔어. 들어가자.”
디아나는 주변을 둘러보자 호수가 근처의 구시가지와는 또다른 매력이 풍성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돌길로 이루어진 메인 도로를 따라 소박하게 생긴 집.
숲이랑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풀 냄새 가득한 동네가 무척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아부지. 저 왔어요.”
헤이든이 들어서자 테이블을 닦던 여자가 그를 부르며 와락 끌어안았다.
“헤이든! 웬 일이야? 어떻게 온 거야?”
“잠깐 휴가 나왔어.”
“일개 정원사보조주제에 휴가는 무슨 휴.”
말하다 말고 디아나에게 시선이 간 여인은 헤이든을 양손으로 붙잡은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안쪽 통로에서 커튼을 재치고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뭐야. 또 왔어? 더 필요한 게야?”
“아녜요. 다 해결했어요. 잠깐 온 거에요.”
중년 남자 역시 헤이든에게 말하려다가 말고 디아나를 발견하자 얼음장처럼 굳어버렸다.
“일리아?”
그는 디아나를 그렇게 부르고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일리아가 누구야?’
사람을 잘 못 알아보셨나 싶어 디아나는 치맛자락을 들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산타하 백작 소속 하녀, 디아나라 합니다.”
아연한 얼굴을 짓던 중년 남성은 일행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참을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싸한 분위기가 감돌자 헤이든이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아버지께 말을 걸었다.
“해독제 구해 달라고 말한 그 하녀에요. 아버지.”
“아...”
그는 그제야 납득을 하며 말을 했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려있다.
“그리만 소보에요. 반갑소.”
“아버지. 디아나가 머물 방 하나 내어주세요.”
“뭐?”
“디아나는 여기에 연고지가 없어서 딱히 지낼 곳이 없어요.”
“그.. 그래? 그럼 고향이 어디인가?”
디아나는 갑작스런 호구조사에 당황했다.
다행히 전생 때 디아나에 대해 조사를 좀 해놓았기에 그녀의 과거를 잘 알았다.
“몬테노...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리만이 놀란 듯 자신의 손을 입으로 가렸다.
그 모습에 헤이든이 더 의아해져 되물었다.
“왜 그래요? 아버지?”
“저.. 저기 실례가 될 수 있겠으나... 보육원이라면 부모님이...”
디아나는 첫 대면한 사이에 묻기엔 조금 무례한 것 같아 불쾌해졌다.
“제가 고아인 것이 혹 문제가 될까요?”
“아... 그건 아닙니다만. 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어린 소녀에게 말하기에 존대가 포함된 그의 언변이 불편해진 디아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고아’라는 단어에 백작부부가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왜? 디아나.”
몸을 돌리는 디아나의 팔을 헤이든이 움켜쥐었다.
“이곳에 머물다 가세요.”
그때 곁에 있던 여인이 말했다.
“반가워요. 전 마릴라에요. 이곳에서 약초를 공부하고 있죠. 헤이든의 똥 기저귀를 받아준 사람이랍니다.”
“누나!”
“이곳 여관들은 미혼 여성이 지내기엔 위험한 사내들이 많아요.
구시가지의 호텔은 무척 비싸구요.
헤이든의 귀한 손님을 이렇게 보내면 안 될 듯 하니 마음 풀어요.”
오히려 부탁해야 할 디아나는 가만히 있는데 제발 머물러 달라며 애원한다.
못내 미안해진 디아나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 상한 적 없습니다.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을 뿐이죠.”
“잘됐네요. 그럼 여기서 묵으세요. 헤이든 방에서 같이 지내실 거죠?”
“네?” “누나!!!”
디아나와 헤이든이 동시에 대답하자 피식 웃으며 마릴라가 대답했다.
“아니, 헤이든이 너무 당당하게 방을 내어 달라기에 같이 쓰려나보다 했죠. 여분의 방이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우리 헤이든이 왜 그럴까.”
“내가 헤레이스랑 같이 방을 쓸게.”
당황한 헤이든이 그녀의 어깨를 밀치며 마릴라에게 저리 가라는 식으로 손짓했다.
“헤레이스가 좋다고 남자 동생이랑 부대끼며 참 잘 있겠다.”
“아님 창고에서 잘게. 됐지!”
“연무장가서 잘 생각은 안 해? 웬일이니? 평소엔 집에 얼굴도 잘 안 비추는 녀석이.”
왠지 헤이든을 놀리는 게 사는 목적이라는 듯 엄청 즐거워하던 마릴라가 그리만에게는 깍듯이 말하였다.
“스승님. 제 방을 내어 줄 테니 저 출근 시간을 좀 조정해주시겠어요? 전 집에서 출근할게요. 여자 손님인데 어떻게 남자 방에 머물게 해요.”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그리만이 고개를 들어 마릴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낫겠다. 헤이든 가기 전까지만 오전 당번을 헤레이스 시키지. 그동안만 네가 조금 불편해도 부탁하마.”
“네, 스승님. 디아나, 따라와요. 안내해줄게요.”
마릴라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당겼고 디아나는 못이긴 척 따라갔다.
그녀의 말대로 여자 혼자 외딴 곳에서 자는 것은 굉장히 위험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디아나를 쫓아가려는 헤이든은 그리만에게 목덜미가 붙잡혔다.
“넌 나랑 이야기 좀 하자.”
그리만의 음산한 말투에 위축되어 고개를 끄덕인 헤이든은 멀어지는 디아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간 디아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평민 집안 풍경에 조금 놀랐다.
1층 작업장은 약초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각종 기계들과 도구들로 난잡했었다.
하지만 2층은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된 아담한 가정집이 있었다.
출입구 바로 옆에 부엌 겸 거실이 있고, 그 옆에 문이 2개, 맞은편에는 문 2개, 그리고 복도 맨 끝에도 방하나가 더 있었다.
마릴라가 방문 하나를 열쇠로 열며 들어가니 침대와 옷장이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다.
곳곳에 놓여 있는 악세사리와 인형들은 여장부 같은 마릴라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귀염뽀짝하다.
“이 방을 쓰면 돼. 구지 잠그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남자들이랑 있으니 조심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난 잠 궈.
화장실은 부엌 옆이야.”
마릴라가 서랍에서 스페어 키를 꺼내 디아나에게 건넸다.
“제가 폐를 끼쳤네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아냐, 아냐. 오히려 내가 고맙지.”
“네?”
“덕분에 아침 당번 땡땡이치잖아.
아침마다 약초 달이기를 헤레이스에게 떠넘기게 되어 지금 얼마나 기쁘다고.
이걸 빌미로 헤이든 일 시켜 먹기에도 딱 좋은 기회라 나야 반가워.
아, 말 편하게 할게. 몇 살이야? 헤이든이랑 비슷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말을 놨네.”
“17살입니다.”
“흠. 생각보단... 어리네.”
마릴라는 침대에 풀썩 앉더니 디아나의 전신을 빠르게 스캔했다.
‘얘... 예쁘네. 17살짜리가 뭐 이리 조숙하니.’
보육원 출신 하녀가 입기엔 드레스의 퀄리티가 매우 좋았다.
늘씬한 몸매에 해사한 얼굴이 같은 여자가 보아도 눈길이 갔다.
무엇보다 그녀의 품행은 일반 평민이 아니었다.
단정한 옷차림, 우아한 걸음걸이.
절제가 묻어있는 어법은 반말하는 자신을 위축들게 만들었다.
“근데... 헤이든이랑 무슨 사이야? 연인 관계 뭐 그런 건가?”
“네?”
“아니, 헤이든 쟤가 사람을 좀 가리거든. 세상 친한 것처럼 굴어도 속으론 철벽을 치는 녀석인데 디아나는 무척 아끼는 듯해서.”
그 말에 디아나의 얼굴에 옅은 홍조빛이 돌았지만 인식하지 못한 채 대답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백작 저택에서 서로 도와 친해져서 그런 겁니다. 애정하거나 남녀 간의 뭐 그런 건 아니니 오해마세요.”
마릴라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감이 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얘도 마음은 있네. 헤이든, 이놈 자식.. 그 얼굴을 갖고선 아직 진행 중인거야? 한심하긴.
뭐... 이런 아이는 한 번에 꼬시기는 어렵긴 하겠어. 난 찬성.’
마릴라는 자신이 두 사람의 촉매제 역할을 해줘야겠다는 므흣한 생각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