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 저택 후문에는 커다란 마차에 사용 물품들이 잔뜩 쌓인 상자들이 잔뜩 실려 있어 남자들이 짐을 내리고 있었다.
“헤이든! 이것 솝 상자들은 수도가 창고에 옮겨 놔. 그리고 비료들은 정원 소품 창고 옆에 쌓아두면 될 거다. 텔먼이 부탁한 거야.”
“텔먼 씨가 이번 주에는 묘목 심어야 해서 제가 꼭 필요하다 하셨는데요.”
테스는 눈동자만 치켜세워 헤이든을 노려보며 말했다.
“건방진 네 녀석 하는 거 보고.”
그러고는 휙 돌아서서는 아랫배를 움켜 잡고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다.
솝이 잔뜩 단 상자를 카트에 옮기면서 헤이든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때려 칠까?"
혼자 조용히 사색 하는 것을 좋아했던 그에게 이런 막 노동은 무척 버거웠다.
어렸을 때부터 꽃과 나무를 좋아했고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겼던 그는 오늘도 짐이 잔뜩 실린 카트를 옮기다 넘어질 뻔한 게 두 번째이다.
하늘의 뭉게구름을 구경하느라 발을 헛디뎠기 때문이다.
“진짜 못 해 먹겠네. 형님만 아니었으면 당장 저 자식을 똥 통에 빠뜨려 버릴 텐 데. 망할 놈의 소공작. 내가 반드시 보상 받아낼 거야.”
궁시렁 거리며 수도가 창고에 도착한 헤이든이 던지듯 카트를 퉁 하고 내려놓았다.
창고 안에 적당한 곳을 찾아 바닥을 쓱쓱 훑고는 솝 상자를 하나 씩 쌓아 올리고 있는데 어떤 하녀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헤이든!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요 며칠 그를 계속 쫓아다니는 그녀는 오늘도 먹을 것을 가지고 그에게 들이대며 같이 먹자고 조른다.
“그거 알아? 왜 테스가 널 죽자고 괴롭히는지. 오늘 일 끝나고 나랑 데이트하면 알려줄게. 저녁 식사를 같이해도 좋고.”
저택 내의 사용인들은 일이 마친 어두운 시간대에 자기들끼리 구석진 곳에서 몰래 밀회를 즐기곤 했다.
굉장히 적극적인 하녀의 태도에 헤이든은 그저 헛웃음만 나와 어깨를 으쓱이며 하던 일을 마저 했다.
“흥. 이러니 비호감이라 소문났지. 사람이 말을 하는데 대꾸는 해야하지 않아?"
여전히 아무런 대답 없는 그에게 조금 실망했는지 하녀가 창고 벽에 기대며 계속 혼잣말을 이어갔다.
"테스가 나탈리를 엄청 좋아하는데 그 나탈리가 널 되게 좋아해. 괴롭힘 당하는 것도 억울한데 나탈리랑 잘해보던가.”
마지막 상자를 쌓아 올리니 솝상자가 헤이든의 어깨만큼 쌓였다.
관심도 없는 말을 계속 하는 그녀를 무시하고 자리를 뜨려는 헤이든을 붙잡은 하녀가 다른 상자를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야, 이거 가져가. 텔먼 씨가 부탁해서 빨아 놓은 걸레야.”
멈칫한 헤이든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차피 정원 갈 거잖아. 거기 창고에 좀 옮겨놔 줘. 알았지? 부탁할게.”
하녀가 싱긋 웃으며 애교섞인 미소를 짓자 헤이든의 입가가 씩 올라간다.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돌아선 그는 자신이 쌓아 올린 솝 상자 위에 손을 올려 기대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문가에 서있는 그의 늘씬한 실루엣이 햇살에 반사되었고 옅은 바람이 불어와 붉은 색 머릿결이 흩날리며 얼굴을 스쳤다.
그 아름다운 자태에 반한 하녀의 볼엔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것도 잠시
우당탕탕
헤이든은 자신이 얹은 손에 힘주어 밀었고 솝 상자들이 쓰러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안에 들어있던 솝들이 바닥에 와르르 모두 쏟아지고 말았다.
엉망이 된 창고를 보며 기겁을 한 하녀를 보며 헤이든이 비릿하게 속삭인다.
“네 일은 네가 직접 해.”
그리곤 유유히 사라지는 헤이든.
어이가 없어 잠시 할말을 잃었던 하녀가 현실을 직시하고 그의 뒤통수에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와! 저 싸가지. 미친 거 아냐? 야! 야! 이거 치우고 가, 이 나쁜 놈아!”
그러거나 말거나 휘파람을 불며 마구간을 향하던 헤이든은 구석 한 모퉁이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곳을 가보니 디아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손으로 건초들을 집어 바닥을 덮고 있는 게 아닌가.
그가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다가가 보니 디아나가 조금은 사악한 미소를 짓고 앉아있었다.
“여기서 뭐해?”
“어머나,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는 디아나가 귀여운 듯 헤이든이 이를 내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무슨 나쁜 짓을 하고 있어서 그리 놀라는 거야?”
“나... 나쁜 짓이라니. 그냥 너 찾다가... 이러고 있었지.”
“참. 해독제는 아직 못 구했어. 내일 다시 봐야겠다.”
“아.. 그래...”
조금은 아쉬운 표정을 짓던 디아나가 고민하는 듯 입술을 잘게 깨물더니 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저기... 혹시 내일 밤에 만나면 안 될까?”
“밤? 몇 시에?”
“좀... 많이 늦은 시간... 한 새벽 12시?”
“... 그 늦은 시간에 왜 날 만나?”
당황한 헤이든이 디아나를 빤히 쳐다보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디아나가 쑥스러워한다.
“혼자서 할 수는 없는 일인데... 힘이 센 사람이 필요해. 무섭기도 하고... 좀 도와줘.”
“그래.”
“새벽에 피곤하지 않겠어?”
“그러게. 피곤할 텐데.”
디아나가 고민하다가 주머니에서 초콜렛을 꺼내 그에게 건넨다.
“지금 내가 가진 게 이거밖에 없어. 나중에 꼭 잊지 않고 갚을게.”
헤이든이 어이없어 피식 웃는다.
‘내가 무슨 꼬마야? 이런 거로 어르고 달래게?’
그 말을 속으로 삭힌 그는 초콜렛의 껍질을 까더니 디아나의 입에 쏙 집어넣었다.
“뭔 일이기에 먹는 거로 꼬드기는 거야?”
디아나가 쑥스럽게 몸을 꼬며 피식 웃더니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그녀의 계획을 일러주었다.
***
산타하 마을은 아르디안 선대 가주가 곡물 상거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성장 시킨 계획 도시이다.
여러 가지 법적 관할권이 겹쳐져 산타하 영주인 백작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기에 영주인 백작이 머무는 저택은 오히려 마을과 조금 떨어져 있다.
헤이든은 산타하 마을에서 종자를 사러 가기 위해 짐 수레를 끄는 말을 재촉하며 가자 그의 옆으로 옥수수 밭과 밀 밭이 번갈아 나타났다.
한참을 가는 중간에 수레 위로 지안이 번쩍 뛰어올라 앉았다.
“왜 이리 늦었어?”
“망할 부집사 하나가 얼마나 괴롭히는지 빠져나오기 힘들었어요.”
지안은 불쌍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약 병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네가 말한 해독제야. 영애는 어때?”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치료됐네요. 백작이 더 이상 핑계 될 일이 없어져 버렸어요.”
“백작은 그 이후로 저택을 안 나가던가?”
“약 구하러 간다는 핑계로 수도 갔다 오더니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요. 듀켈까지 무리해서 다녀왔으니 지칠 만도 하죠. 아직 왜 갔는지는 못 알아내셨죠?”
“그래서 소공작이 산타하에 간다더군. 엄청 싫어하던데. 레이크쉐이든에 몽유병 환자 수가 배로 늘었어.”
“하. 우리 아부지 똥 줄 타게 생겼네. 역시... 용의 산맥 때문입니까?”
“저번에 내린 비로 작물들이 썩은 곳도 있고 산맥에서 야생 짐승들이 굶주려 내려오고 있어. 먹이 사슬에도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드래곤이 멸종된 건 확실해요? 드래곤이 인간들 내쫓으려고 이러는 건 아니구요?”
“멸종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거야. 마지막까지 남은 드래곤은 친 인간적이었다 해. 그렇지 않으면 아르디안가에 그런 축복을 줬겠어? 오히려 그동안 드래곤이 막아주던 악마의 기세가 조금씩 활기를 띄는 거지.”
“... 황제가 하이올 왕국 정벌을 핑계로 아르디안 공작가에 유그리타 강의 사용 관세를 30%인상했다는 게 사실이에요?”
“응. 거기다 황제가 듀켈 가에서 요구한 군수 물자 량의 추가 지원을 허가 했다더군. 그걸 고스란히 아르디안에서 징발하고 있고. 우리 소공작 혈압 올라가는 소리 여기까지 들리지?”
아르디안 공작령은 수도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진 않았으나 용의 산맥 8할이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어 통행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아르디안의 가장 큰 도시인 레이크쉐이든과 연결되어 있는 유그리타 강에 의지하여 대부분의 물류 유통을 옮기는 실정이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산맥의 이상 징후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황제가? 피해 받는 주민들을 관리하고 있는 아르디안을 지원해주지는 못할망정 과세 인상이라뇨.”
“아르디안에게만 박하겠나. 황권 탈환하고 제 의견에 반하는 인간들은 모조리 죽여 버리는 놈인데.”
그 말을 들은 헤이든은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이번에 백작한테 접근할 기회가 생겼어요. 그 하녀가 저에게 뭘 부탁하더군요.”
“네가 웬일로 누군가의 부탁을 이리 잘 들어주지?”
“도움이 되니까요. 근데... 그게 제가 혼자하기엔 좀 벅찬데 대장이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뭔데?”
“쥐새끼를 잡아야 한다네요. 내일 밤 10시에 마구간으로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