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어떻게. 피부가....”
“경화된 부분이 많이 흐려졌죠?”
“이게 뭐야? 대체 뭔데 씻으면 더 악화되던 피부가 좋아지는 거야?”
지금 디아나는 유스티나의 치료를 위해 욕실에 앉아있었다.
백작영애는 디아나가 자신의 피부에 솝을 발라 씻어주자 눈에 띄게 변한 제 피부에 무척 놀란 모양이다.
'내 저 기분 알지.'
디아나가 아까 빨래통에서 거품을 내고 있던 솝을 그대로 가져왔기에 바로 쓸 수 있었다.
“솝이라는 세탁용 세제입니다.
아가씨가 사용하시는 세안 용 비누는 일반 동물의 기름을 추출하여 만듭니다.
하지만 솝은 서부 샤르냐에서 마법사들이 다른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 평민들도 저렴하게 구입하여 많이들 사용하고 있지요.”
“그 다른 재료가 뭔데?”
디아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 그녀와 시선을 나란히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마수의 기름을 추출합니다.”
“뭐? 마수?”
놀란 유스티나가 벌떡 일어나 디아나에게 솝을 집어던졌다.
“이년이 감히 나에게 이따위 것을 가져와 내 몸에 발라?”
“그래서 치료 안 하시게요?”
“뭐?”
“이 질병의 이름은 '라리갈리마'입니다. 용의 산맥에서 흘러나온 저주가 깃들어있지요. 지금 산맥 주변을 중심으로 마을에 계속 퍼지고 있습니다. 다만 평민들보다는 귀족들이 더 잘 걸린다하여 귀족병 이라고도 불려요. 왜 그럴까요?”
“평.. 민들은 솝을 자주 쓰니..”
“네. 무슨 이유인진 몰라도 솝을 바르면 검게 경화된 피부가 낫습니다. 아마 마수의 영향이지 싶어요. 하지만 라리갈리마가 더 무서운 건 다른데 있어요.”
“더 무서운 거?”
“아가씨의 몽유병.”
유스티나가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이건 그녀의 부모님과 집사, 시녀장만 알고 있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는 그녀의 치부였다.
“네 년이 어떻게...”
“그게 라리갈리마 증상이니까요. 어서 약을 드시지 않으면 수마에 빠질 수 있어요.”
“약? 몽유병을 치료할 약이 있어?”
“네. 있어요. 제가 낫게 해드리겠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디아나를 바라보던 유스티나의 눈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그것을 보던 디아나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왜 그리 악독하게 살았을까.
그깟 드레스 한 벌 사겠다고 아등바등 덤벼들었고 사교계의 유행, 가십 거리에 목숨을 걸었으며, 저를 무시하는 다른 사람들을 짓밟아 우대 받기를 갈구했었다.
이깟 솝 하나로 저리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으면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유스티나에게 다가간 디아나는 화장대에 있던 보습제를 꺼내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걸 충분히 바르세요.”
“그래. 알겠다. 네가 하라는 건 다해야지. 그 몽유병을 치료해주는 약은 어딨어?”
“아까 계약서에 서명하셨듯이 증서와 맞교환 하는 거로 하죠.”
“그래. 고마워. 디아나. 뭐 더 필요한 거 없니? 뭐든 내가 다 지원해줄게.”
유스티나의 세상 다정한 말투에 귀가 솔깃해진 디아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머무를 방 한 곳을 마련해주실 수...”
“방? 물론. 그럼 내 방 근처로 하나를 내어 줄게. 앨리스. 안내해드려라.”
“아가씨! 얘는 세탁 하녀입니다.”
“그게 뭔 상관이야. 날 치료해주는 아이인데. 어서!”
입이 대 발 나온 앨리스가 안내한 방은 영애의 방보다는 좁고 허름했지만 귀족들이 쓰는 손님 방이었다.
세탁 하녀들과 한 방에서 우글거리며 자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몹시 만족스러워진 디아나는 앨리스가 나가자마자 침대에 털썩 누웠다.
‘하! 환생한지 아직 하루도 지나질 않았네. 정말 스펙타클하다.’
이제야 환생 이후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누우니 자신의 얼굴 위로 빨간색 숫자 4가 영롱하게 회전을 하며 돌고 있다.
“이건 뭐야, 대체?”
그녀가 그 숫자를 향해 손으로 휙휙 저어보여도 사라지질 않는다.
앨리스도 별 말 안하는 것 보니 진짜 내 눈에만 보이나보다.
“중요한 게 아니니까 됐고!”
디아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 유스티나에게 서명 받은 계약서를 쭉 펼쳐보았다.
그곳에는 피부치료 완료시 루바냐 해변 앞 저택소유증서증여와 몽유병치료약에 대한 포상금에 대해 기록되어있었다.
‘일단 솝 하나 달랑 가지고 온 것치고는 괜찮은 성과야.’
하지만 디아나는 전생의 자신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계약을 해도 뒤통수치기 선수인 그 여인은 또 말을 바꿀 수 있단 말이지.
확실하게 받으려면 믿을 수 있는 패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테스. 이 저질 부집사야. 이번엔 안 당한다.’
한밤중 몽유병으로 저택을 돌아다니던 유스티나가 주방에서 은제 식기구를 훔치고 있던 부집사 테스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그 수치심에 히스테리가 정점을 찍었더랬다.
‘디아나가 죽기 2일 전이었지. 아마? 그 때문에 죽여 버린 거 같기도 하고.’
저주에 성추행이라니... 전생의 저가 포악해질 수밖에 없었겠다 싶어 과거를 회상하다가 문득 그 사람이 떠올랐다.
진 마르소 드 아르디안.
유스티나에게는 뗄레야 뗄 수없는 그녀의 첫사랑. 그에 대한 집착이 디아나를 죽음으로까지 몰아갔다.
유스티나를 죽이겠다고 쫓아오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디아나는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제가 그리 싫었을까?
소공작이 디아나를 바라보던 그 애틋한 시선이 기억난 그녀는 이번 생에선 절대 이 둘을 만나게 하지 않으리라 의지를 불태웠다.
죽기 싫으니까!
‘소공작이 오기 전에 저택소유증서와 최대한 많은 돈을 챙겨 도망가자.’
그러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할 일은 정원사를 만나야한다.
전생에 유스티나에게 솝에 대한 정보와 몽유병 약을 지어준 것이 그 사람이다.
외향이 퍽 인상적이기에 저택 내에서 그를 찾는 것은 식은 스프를 먹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다만 그를 어떻게 아군으로 만들지가 관건이다.
그 정원사가 꽤 능력자였기 때문이다.
‘소공작의 끄나풀에다 소보에 약초방의 아들이라 그가 구해온 약들이 꽤 좋았던 기억이 있어. 게다가 천재잖아.’
일개 정원사라 무시했던 그는 실제로 귀족세계에서 유명한 천재화가였다.
워낙 그 작품 수가 적어 희소성이 높았을 뿐 아니라 천부적인 재능으로 그가 그린 그림에서 사람이 뛰쳐나온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그런 걸 다 차치하고 당장 그 정원사를 만나야하는 이유는 아주 명확했다.
전생의 자신이 디아나에게 먹인 독약은 '카릴로'라는 독초인데 이 해독제가 필요하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정원사에게 해독제를 만들어 달라 해야지.’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한 디아나는 침대에서 나와 주름진 치마를 탈탈 털었다.
그러다 문득 그 옷이 몹시 헐고 젖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디아나는 자신의 초라한 차림새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지하 세탁보관함에 가서 깨끗한 하녀복이라도 얻어올까?’
똑똑똑
그녀의 방문에서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발걸음을 옮겨 열었더니 그녀가 몹시 사랑하던 사람이 앞에 서있었다.
‘아빠!’
타지우 산타하 백작이 그녀의 앞에 인자하게 서있던 것이다.
디아나는 반가움에 저도 모르게 소리 지를 뻔했다.
진에게 처형을 당한 비운의 타지우 산타하 백작.
그는 아르디안 가문의 충신이었고 에시온 아르디안 공작과 오랜 친우 사이였다.
그런 그가 왜 오랜 주종관계를 유지하던 아르디안을 배신한 것일까?
아마 그때 그 서신과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해.
이런 상념에 젖어있는 디아나에게 타지우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았다.
“디아나라 했느냐.”
디아나는 순간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 난 유스티나가 아닌 디아나구나... 당신은... 내 아빠가 아닌 거야.’
말조차 하기 힘들게 그리움이 복받쳐 올랐던 그녀에게 허탈감이 몰려왔다.
타지우와 유스티나는 정말 애틋한 사이였다.
산타하 백작은 정말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훌륭한 인품의 아버지였다.
타지우는 엄청난 딸 바보라 유스티나가 가는 모든 곳에 시선을 주었고 돌보아주었으며 사랑해주었다.
그녀가 16살이 넘어서는 코르셋 입기 힘들다고 식사를 거르며 투정 부리던 그녀에게 손수 크림 스프를 만들어 와 굶으면 안 된다고 떠먹여주던 백작이다.
디아나는 더 이상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그를 애통히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 고맙구나. 내가 너에게 베풀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내 필요한 것을 모두 줄 테니 말해 보거라.”
자꾸 감상에 빠지는 제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디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대답했다.
“옷이... 너무 더럽습니다. 백작님. 천한 저에게서 귀한 손을 거두어주시지요.”
“내 딸을 치료한 훌륭한 너 자신을 그리 평가하지 말거라.
당장 너에게 의류와 장신구들을 선물하마. 필요한 것은 총괄 집사인 안드레에게 다 고하라. 내 무엇이 아깝겠느냐.
부디... 부디 내 딸아이를 꼭 치료해 다오. 부탁한다.”
아.. 저에게 아깝지 않게 다 쏟아 부어주겠다는 다정함도 디아나가 아닌 유스티나를 위한 것이구나.
전생의 저에게 아빠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무너져 내렸다.
유스티나는 이렇게도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저 귀한 걸 갖고 있던 나인데 왜 그렇게 갖지 못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불행하게 살았을까.
“그리하겠습니다.”
디아나의 대답에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멀어지던 타지우가 향한 곳은 역시 유스티나의 방이었다.
그 모습에 몹시 우울해진 디아나는 아까의 의욕들이 다 사라져버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곤 얼마 되지도 않아 하녀들이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잔뜩 들고 들어와 옷장과 서랍을 가득히 채웠다.
하녀들이 다 나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일어선 디아나는 옷장을 열어 드레스를 살펴보았다.
유스티나가 입는 옷보단 조금 떨어졌지만 메이드 복보다는 천 배 훌륭했다.
디아나는 서둘러 환복을 하고 기분 전환을 위해 정원을 돌아다녔다.
정원사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가 보이지 않아서 인지, 타지우 때문인지, 그냥 이 상황이 짜증나는 건지 무척 기분이 다운 된 디아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을 보며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팍. 팍. 퍽. 찍!
저택 후문 근처를 걷고 있던 디아나의 귓가에 뭔가 엇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이 생긴 그녀가 그쪽을 기웃거리니 어떤 청년이 장작을 패고 있었다.
그 폼이 무척 어설퍼 뭐 하는 건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자 디아나는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찾았다. 정원사.’
아... 짜식. 뉘집 아들인지 되게 잘생겼네.
아직은 소년미가 남아있어 앳되지만 또렷한 눈매에 구릿빛 피부가 꽤나 매력적이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붉은 색 머리가 조금은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냈고 큰 키에 다부진 어깨가 정원사로 썩히기엔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얘 루바냐 저택에서 같이 지내면 딱 좋겠네.’
이미 디아나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그리움은 사라진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