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르 쿠궁
찬란한 달빛 아래 빛나던 리암제국의 수도 바트리아.
어두운 먹구름들이 밤하늘을 집어 삼키듯 몰려와 어두움이 짙게 깔렸다.
디아나가 아르디안 가문의 마차를 타고 수도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화려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뛰어 들어간 곳은 마법사, 도르키안느의 실험실.
“나... 나 좀 공작 저택으로 보내줘요.”
“괜찮으세요, 아가씨?”
“어...어서요! 당장 날 저택으로 보내줘요!”
새하얗게 겁에 질려있는 그녀를 보던 마법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곤 테이블 위에 쌓여있던 마정석 중 하나를 집어 들어 텔레포트를 시전하였다.
순식간에 아르디안 공작 저택 로비에 도착한 두 사람.
두 여인 때문에 놀란 사용인들의 아연한 표정을 뒤로 하고 디아나는 헤이든의 작업실로 뛰어갔다.
쿵쿵쿵
주먹으로 헤이든의 방을 두들기다 기다리지 못해 문을 벌컥 연 디아나가 캔버스 앞에 서있는 그를 발견했다.
“디아나.”
놀란 헤이든이 붓과 파레트를 들고 있는 채로 그녀를 불렀다.
디아나는 두 팔을 뻗어 그를 꽉 끌어안았다.
너무 심하게 떨고 있는 그녀에게 당황한 헤이든이 잡고 있던 용품들을 집어 던지고는 그녀를 안았다.
“왜 이러는 거야? 어? 무슨 일이야?”
헤이든이 얼굴을 보려 떨어지려하자 디아나는 그를 더 끌어당기며 몸을 밀착시켰다.
“무서워. 이든아... 나 무서워... 내가 좀 이상해. 흐흐흑”
그에게 안기자 제 안에서 시끄러웠던 속삭임이 가라앉았다.
안도감을 느낀 디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뭔데? 뭐가 무섭다는 건데? 어? 누가 널 헤쳤어?”
그녀가 1층에 나타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 뛰어온 아르디안 공작과 지안이 문 밖에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무 서글프게 울던 디아나가 지쳐서 주저앉아버리자 다급히 뛰어 들어온 공작이 그녀를 안아서 침실로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울면서 헤이든만을 찾는 디아나.
어린 아이가 잃어버린 부모를 찾는 듯한 그 모습이 무척 간절하고 절박하다.
그녀에게 다시 다가간 헤이든이 따뜻한 수건을 들어 부드럽게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잠들 때까지 있을게. 우선 좀 자.”
“무서워. 이든아.”
“뭐가 무서운데. 무슨 일 있었어?”
그의 질문에 디아나는 손톱을 물어 뜯으며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제가 아픈 것 마냥 얼굴을 찌푸린 헤이든이 그녀의 손을 조용히 잡아주었다.
그리곤 그 손을 이불 안으로 넣어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옆에 있을 테니까 마음 편히 쉬어. 응?”
디아나가 다급히 헤이든의 손을 붙잡고 울먹이며 말했다.
“어디 가지마.”
“그래. 여기 있을게.”
“내 옆에 있어.”
“그래. 아무데도 가지 않을게.”
그녀의 이마에 살포시 입 맞추는 그의 온기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깊은 날숨이 뿜어져 나왔다.
헤이든이 이불을 들어 그녀의 목까지 끌어 올리자 그녀의 애달픈 눈커플이 껌벅껌벅한다.
겁을 먹어 탁하던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이내 수마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날 침대 헤드에 앉아있는 디아나의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전날 입고 있던 드레스조차 갈아입지 못한 채 넋을 두고 있는 그녀에게 지안이 다가갔다.
천천히 침대 맡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물을 마시게 도와주었다.
“거래를 어기셨더군요. 공작영애.”
힘겹게 물을 한 모금 마신 디아나가 지안을 바라본다.
그의 은백색 머리카락이 어두운 방안에서도 반짝거려 역시 검은색 머리보다 저 모습이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걸 입 밖으로 꺼낼 만큼 몸에 힘이 들어 가질 않아 마냥 바라보았다.
“계약을 어겼으니 위약금을 내셔야죠.”
“...”
예전 같으면 말대꾸를 하며 받아쳤을 그녀였지만 그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하였다.
낯선 그녀의 모습에 더 걱정이 된 지안은 부드럽게 그녀의 턱을 제 쪽으로 돌렸다.
“몸이 아픈 건가? 말을 해야 도와주지.”
그녀는 얕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지안은 늘 그랬듯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며 그의 은백색 빛을 전하자 그녀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졌다.
마른 입술을 힘겹게 여는 그녀.
그 목소리에 짙은 어둠이 깔려있다.
“제 안에 어떤 속삭임이 있어요.”
“속삭임?”
“내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해요..
근데 그게 내가 아니라서 너무 무서워요.
그런데 헤이든에게 가면 그 속삭임이 사라지며 난 안도하게 되죠.
이런 나에게 안기지 말라고 할 정도로 당신은 모진 사람이었나요?”
그의 눈동자가 탁하게 흔들렸다.
저 모진 말이 그의 마음 한편을 시리게 한다는 걸 그녀는 알까.
지안은 깍지를 끼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볼 위로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 손길이 무척 따뜻해 디아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건조하여 딱딱해진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고 촉촉한 그가 맞닿자 커다랗게 떠지는 그녀의 청안.
그는 볼을 잡던 손을 목 뒷덜미로 미끄러지듯 나아가 그녀를 더 끌어당겼고 그녀의 입술 위로 자신의 타액을 바르며 그녀를 탐닉한다.
처음 느껴보는 그 말랑한 황홀감에 디아나의 눈이 서서히 감았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아 목마름을 해결하듯 그가 주는 생기를 빨아들여 그동안 느껴온 갈증을 다 날려버리고 싶어졌다.
어린 연인의 입맞춤은 처음 맞닿은 혀의 감촉에 숨어버렸다 이내 탐색하듯 서로를 찾는다.
오랜 시간 맞닿아있던 두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며 이마를 기댄 두 사람은 잠시 침묵 속에 여운을 흘려보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위로 받지 마. 디아.”
디아나는 깍지를 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나지막한 그 속삭임이 너무 달콤해 취해버릴 것 같아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
“나만 봐. 다른 사람에게 가지 말고. 내가 널 지켜줄게.”
“전 두려워요.”
“내가 널 안아 줄 거야.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그녀를 감싼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지안이 그녀를 지켜주는 것인지,
디아나가 그를 지켜주는 것인지...
시끄러운 그들의 마음을 서로의 온기가 잠재워주길 바라며 두 사람의 몸이 더욱 밀착되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테오도르.”
그녀의 이질적인 목소리에 놀란 지안이 몸을 떼어냈다.
디아나의 얼굴이 전과 다르게 표독스럽고 영악하다.
“너의 욕망과 타협을 맺었군.
잘했어. 그렇게 나와야 황좌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지.
권력이란 인간들의 어마어마한 욕구들로 쌓아 올려진 거대한 불화산 같거든.
그 자리를 지키려면 적어도 네 욕망쯤은 스스로 해결 해야 하지 않겠어?”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뺏지 않으면 빼앗기는 거야.”
***
리암제국 1420년. 아르디안 공작령, 산타하 백작저택 별관 숙소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아침이야! 얼른 일어나!”
유난스런 동료의 고함에 디아나가 부스스 눈을 떴다.
빽빽하게 붙어있어 발조차 디디기 힘든 별관 하녀 전용 2층 침대에서 삐그덕 소리를 내며 힘겹게 내려왔다.
또다시 똑같은 일상을 시작되었다.
새벽부터 끓인 물에 솝을 녹여 주인님들의 속옷과 실내복을 넣고 그것을 주물러 헹군 다음 햇볕에 말렸다.
이제는 제법 손에 익어 동료들을 따라 일을 해내는 디아나 곁에 선임이 칭찬해준다.
“한동안 정신 나가 있더니 이젠 잘하네. 가서 좀 쉬어. 내가 마무리할게.”
디아나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 자리를 떠나 별관 수도가 창고의 한적한 곳에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하... 힘들어. 이제 이 일도 4일 남은 건가.”
그녀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테이블 위에 훌쩍 뛰어 올라 앉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창가에 제 모습이 비춰 보인다.
“아직도 이 모습에 적응을 못하겠네.”
디아나는 전생에 이곳 저택의 주인, 유스티나 폰 산타하 백작 영애였다.
아르디안 공작 시해 공범자로 지목되어 쫓기던 그녀는 절벽으로 떨어진 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디아나가 되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평생 백작 영애로 살다 세탁 하녀가 된 디아나는 처음 해 보는 허드렛일이 무척 버거웠지만 오늘 같은 순간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버텨냈다.
디아나가 슬쩍 치마를 들어 자신의 늘씬한 각선미를 감상하였다.
‘이 우유 빛깔 고운 이 피부를 봐.
하녀 치고는 너무 예쁜데.’
윤기 나는 밝은 황갈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
몹시도 헐고 추리한 메이드복조차 예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굴곡진 몸매.
전생에선 저주에 걸려 온 몸이 거뭇거뭇하여 징그러웠는데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에 실로 감탄이 된 디아나는 유스티나를 떠올렸다.
‘지금이면 점심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겠지.’
디아나가 된 지 2주가 지난 지금도 전생의 자신을 한 번도 마주 하지 못했다.
아마 유스티나는 지금 라리갈리마란 저주에 걸려 피부가 검게 경화 되어있기에 저택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으리라.
한때는 아르디안 공작령 내에서 사교계의 여왕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칭송 받던 여인이 괴물이 되어가는 제 모습에 얼마나 절망했겠는가.
디아나는 테이블에서 내려와 낡고 허름한 치마를 툭툭 쳤다.
그리고는 다부진 발걸음으로 백작 저택 본성을 향해 걸어갔다.
‘지금이라도 막아야 해.
유스티나가 나를 죽이기 전에.’
앞으로 4일 후.
디아나는 유스티나에 의해 죽는다.
히스테리가 극도로 심할 그녀의 폭주를 막아야 했다.
“유스티나. 기다려. 내가 널 구해줄게. 그리고 이번 생은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 않을 거야.”
걸어가는 디아나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