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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별이 지다
작가 : 올서리
작품등록일 : 2021.12.13

언제부턴가 세상에 닥친 기후의 변화, 환경파괴,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 등의 현상이 우리와 가까운 어느 별의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호는 그 별의 흔적을 쫓아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려고 노력한다. 초신성과 고래, 오로라, 그리고 가족에 관한 이야기.

 
#18. 시한부 (4)
작성일 : 22-02-03 17:46     조회 : 370     추천 : 3     분량 : 6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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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다 깨기를 반복하던 연호는 침대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 깊이 잠이 들진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오래 누워 있으려고 노력했다. 밤을 지새우고 맞이하는 지친 새벽이 아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부여받은 생의 축복이며, 고단한 삶의 휴식이자 세상과의 일시적인 단절이후 맞이하는 환희의 아침을 맞보려고 애를 썼다. 이제껏 살아온 오랜 습관을 깨버린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노력하는 그 모습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한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때보다 새벽이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와 아침 산책을 다녀온 연호는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연민은 회사에 일이 있어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이렇게 일찍 아침식사를 해본 지가 언제였던가. 입맛은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먹으려고 노력했다. 해가 서쪽에서 뜰만한 아들의 달라진 모습에 숙희는 더 호들갑이었다. 요즘 들어 평소와는 달리 부지런한 아들의 모습에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녀가 기분이 좋은 이유는 또 있었다. 며칠 전, 상현은 진오의 선배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증세가 좋지 않은 것만큼은 틀림없었고, 나빠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고 그 선배 의사가 진오에게 말했지만, 긍정적인 얘기 또한 들을 수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운 좋게도 지금은 정체기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 앞으로 유심히 지켜보면서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으면 더 이상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정말 다행이네요. 선배가 앞으로 신경 좀 써주세요.”

 

 숙희는 진오로부터 이번 검사에 대한 결과를 듣고 기분이 더 들떠 있었다. 가족들은 모두 안도했고, 가라앉았던 집안 분위기는 전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일찍 아침을 먹다니 도대체 얼마만이야. 아침 설거지는 내가 할게.”

 

 연호의 눈치를 살피며 숙희가 말했다.

 

  “너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니, 이렇게 오랜만에 같이 아침 식사를 하니까 좀 이상해서 그래. 근데 엄마도 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숙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오늘 선화랑 만난다며?”

 

 연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숙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순간 아차 싶었지만,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아니, 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걔 엄마가 얘기해줘서 알았지.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알았어, 괜찮아. 근데 앞으로 너무 관심 같지 안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알아서 할게.”

 

 행여 아들의 마음이 변할세라, 숙희는 평소보다 더 과장된 표정과 몸짓으로 열을 올리며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너희들끼리 잘 만나고 그래라, 알았지?”

 

 옆에서 과일을 먹으며 신문을 보고 있던 상현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

 

  “무슨 소리들을 그렇게 하는 거야? 얘가 누굴 만난다고? 선을 본다는 거야, 지금?”

 

  “선이라니, 지금이 무슨 옛날인줄 알아요? 그게 아니고, 아니다, 아냐! 당신은 몰라도 돼요. 나중에, 나중에 따로 얘기 합시다.”

 

 

  미리 수업을 조정해놓고 평소보다 일찍 수업을 마친 연호는 마지막 수업이 끝나갈 무렵부터 괜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자체도 부담스러운 일인데 그것도 여자라니. 더욱이 어렸을 때의 부끄러운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동생을 거의 20년 만에 만난다는 사실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수업을 겨우 마치고 어느새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학원을 나와 근처의 약속장소로 가는 동안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겉으로 태연한 척은 했어도 내심 긴장이 됐고, 내키지 않는 짓을 하는 것 같아 영 찜찜했다.

 

  「오빠, 수업 중? 오늘 좀 일찍 끝났는데, 이따가 같이 야식 먹을까?」

 

  「그래. 근데 오늘 좀 늦을 수도 있으니까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연호는 선화와의 약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모른 척 하고 싶었다.

 

  ‘차라리 동생이랑 밥이나 먹을까?’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연애를 싫어하는 것도, 성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불행해 지는 꼴은 보기 싫었다. 나를 이해하고 감당해 달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일인지, 나 편하겠다고 남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내가 이 지경이 됐지?’

 

 

  숙희는 계속 시계를 보면서 애타게 연호를 기다렸다. 상현은 벌써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녀는 영 잠이 오질 않았다. 밤이 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아들이 이렇게까지 반갑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어릴 적의 공감대가 있어서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호감을 갖고 계속 만나다보면, 앞으로.....’

 

 상상은 날개를 달고 한없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흐뭇한 일이었다. 그때 숙희의 환상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고 연호가 들어섰다.

 

  “왔어, 아들? 좀 늦었네?”

 

  “응, 선화 바래다주고 오느라고 좀 늦었어. 근데 왜 주무시지 않고?”

 

  “우리 아들 기다렸지.”

 

  “.....”

 

 침묵이 흘렀다. 연호는 숙희가 무슨 말을 기다리는지 알고 있었지만,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숙희는 계속 눈치를 살피며 아들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연호는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야만 한다는 것이 괴롭기만 했다. 선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선한 눈빛과 예의바른 모습, 그 속에 숨겨진 열정, 뭐 하나 거슬리는 게 없었다. 어릴 적 순수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아니 더 예뻐지기까지 했다. 쓸데없이 긴장하면서 속을 끓였던 자신을 너무나도 편히 대해주었고, 마치 오랫동안 만나왔던 친구처럼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연호의 기억 속에는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금까지 함께 있었다. 연호는 자신을 좋게 기억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기억은 흐르고 흘러 어디로 가버렸는지조차 잊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기억들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살아있을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선화는 중학교 선생님이었다. 학생을 가르친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은 각자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이야기며, 교육관에 대한 얘기들, 주변 선생님들에 대한 얘기들을 하면서 어색함을 벗어날 수 있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무튼 그녀와는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숙희 앞에서는 그런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래, 오늘 어땠어?”

 

  “아, 몰라! 걔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 엄마는 내가 여자 보는 눈이 얼마나 높은데, 그 정도로는 눈에 안 들어와.”

 

 숙희는 실망을 넘어,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아마 이런 심정을 아니었을 것이다.

 

  “뭔 소리야? 내가 사진으로 봤을 때는 예쁘고 참해 보이던데, 네가 뭘 좀 착각하는 거 아냐? 네 주제도 좀 알아야지!”

 

 연호는 괜히 심술을 부렸다.

 

  “엄마! 걔가 못생겼다거나 성격이 이상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단지 내 취향이 아니라는 말이야.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알던 애라 그런지, 더 여자로 안 보여. 걔도 내가 남자로 안 보였을 거야. 그냥 예전에 알고 지내던 동네 오빠 정도? 그러니까 어쨌든 엄마 말대로 내 주제를 잘 파악하고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편하게 계셔.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

 

  “있기는 개뿔! 아이고, 나도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나저나 걔 엄마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숙희는 잔뜩 울상을 지었다.

 

  “엄마. 선화 걔도 내가 마음에 없는 눈치였어.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가웠던 것뿐이지. 그냥 옛날 얘기랑 살던 동네 얘기 하면서 시간 보내다 왔다니까. 그 아주머니도 엄마랑 똑같은 고민을 하실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다시는 이런 거 주선하지 마. 서로 불편하기만 해.”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숙희의 모습에 연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까지 늘 이런 식으로 도망치고 숨어 다니면서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였다고 생각하니 더 불편했다. 이대로 엄마를 보내자니 영 내키질 않았다. 어떻게든 다른 얘기라도 꺼내서 좀 더 붙잡아 놓고 싶었다.

 

  “아 참? 연민이 자? 아침에 일찍 출근하더니 피곤했나? 내가 보낸 문자도 안 본 것 같던데?”

 

 숙희는 그제야 생각난 듯 놀라며 말했다.

 

  “글쎄, 연민이가 몸이 안 좋다고, 퇴근하자마자 밥도 안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 뭐냐. 너 때문에 깜빡했다. 잘 자는지 아니면 깼는지 얼른 가봐야겠어. 너랑은 내일 다시 얘기하자!”

 

 연호는 돌아서려는 숙희를 붙잡고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는 그런 얘기를 왜 이제 하는 거야? 진작 얘기 했어야지.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냐?”

 

 숙희는 아들의 역정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날’ 이후, 동생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열 일 제치고 나서는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아주 어릴 적부터 동생을 잘 챙기던 아이였는데, 그 사건 이후로는 그 정도가 병적으로 심해졌다. 어디 하소연할 때도, 말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안쓰러웠다. 연애나 결혼에 관심이 없는 이유도 혹시 동생 때문은 아닌지, 숙희는 한없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연민에 대한 관심과 걱정은 온 가족이 모두 같은 마음이었지만, 연호는 누구보다도 심한 죄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들이 지고 있는 그 짐들은 온전히 어미인 자신이 지어야 할 몫이라고. 그래서 아들이 짊어진 짐을 어떻게든 덜어주고 싶었고,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 다 털어내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연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숙희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가는 연호의 뒷모습에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연민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져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녀는 퇴근 후, 자신이 보낸 문자에 답하는 오빠의 문자조차 보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속을 끓이며 직장을 다니던 그녀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엄마. 나 오늘 피곤해서 그런지 입맛이 없네. 먼저 들어가서 쉴게. 쉬면 괜찮아질 거야.”

 

 연민은 이미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숙희에게는 그냥 피곤하다고, 좀 자면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키며 방으로 들어갔다. 숙희는 딸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 또한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아까 오빠하고 문자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연민은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1층으로 내려간 연호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간 뜸하던 악몽이 요 며칠사이 다시 살아난 것 때문에 더 그랬다. 숙희도 연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연호를 뒤로 물리고 먼저 연민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려던 연호에게 숙희가 말했다.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연호는 문 앞에 멈춰 섰고, 불안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연호에게 작은 목소리로 숙희가 말했다.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그래? 누가 보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겠다. 동생이 좀 아플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내가 보고 올 테니까 진정해.”

 

 숙희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애써 태연한 척 했다. 침대 앞에 다가간 그녀는 찬찬히 연민을 살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깊은 잠에 빠져있는 연민의 이마를 닦아주면서 숙희는 얼굴을 살짝 만져보았다. 다행히 열은 없었지만, 좀처럼 불안감을 떨칠 수는 없었다. 평소 연민은 매우 예민했기 때문에,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있어도 누군가 방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그 즉시 잠을 깨곤 했다.

 

  ‘얘가 이렇게 들어와서 이마까지 만지는데도 깨질 않네. 어디가 많이 안 좋나?’

 

 숙희는 일단 조용히 방을 나왔다. 연호는 여전히 초조한 얼굴로 문 앞에 서있었다.

 

  “연민이는 괜찮아? 아까만 해도 나랑 야식 먹자고 문자했었는데...”

 

 후회스러웠다. 그때 선화를 만나지 않고 그냥 연민을 만났더라면.

 

  “아주 깊이 잠들었어. 자고나면 괜찮을 거야. 내일 상태 봐서 출근을 할지, 말지 결정해야겠다. 너도 늦었는데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올라가서 자라.”

 

 숙희는 연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직접 방에 들어가 연민의 상태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숙희의 말을 따랐다. 그녀는 연호가 2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연호는 2층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그녀가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다시 계단을 내려와 거실로 갔다. 그리고 동생의 방에서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연호는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참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어둠에 완벽히 적응한 몸과 마음이 그를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졌고, 한없이 몽롱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머릿속의 잡념들은 종잡을 수 없는 무의식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임종을 앞둔 우주 저 먼 곳의 별도, 아버지나 동생에 대한 생각들도 모두 뿌옇게 희석되어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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