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의 산불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진압은 고사하고 불길은 태백시뿐만 아니라 주변으로 점점 더 확산되고 있었다. 태백시의 일부 주민들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급히 대피 중이었으며, 당국은 시 전체에 대피령을 내리기 위해 관련 법령을 검토하고 있었다. 소방당국이나 관청, 군경은 물론 주민들도 모두 합심하여 끝없이 퍼져나가는 불길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건국 이래 최악이라는 이번 산불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었으며, 그 원인이 무엇이든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불이 나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들이 나돌았고, 있지도 않은 흉흉한 소문이 더해져 가뜩이나 어려운 시국에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타협과 용서가 없는 무자비한 불길은 도무지 그 위세가 꺾일 줄을 모르고 번져나갔다.
미국의 서부에서 발생한 산불은 이미 주변의 산림은 물론이고 근처의 마을이나 작은 도시들까지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미국은 불길을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건조한 기후와 거센 바람 때문에 불길은 점점 더 확산되고 있었다. 주변의 대도시들을 향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돌진하고 있는 불길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태계를 위협하는 재앙이었고, 그 피해는 가늠조차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미국만의 일이 아니었다. 세계의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산불과 자연재해들은 지구 전체의 기후와 환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고, 경제적으로도 천문학적인 손실을 인간에게 안기면서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살아있는 지구와 그곳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인류에게 자연재해는 어쩌면 당연히 받아들여야할 숙명일지도 모른다. 생명 그 자체인 지구가 끝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재앙일지도 모르지만, 이 지구라는 생명체에게는 한낮 성장 과정일 뿐이다. 언젠가는 그 생명을 다해 우주의 저편, 한줌의 재로 사라질지라도 지구가 살아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제 품안의 생명을 보듬으며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지구에 대한 한 구절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연호를 짓누르고 있었다. 상념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기분은 자꾸만 가라앉았다.
‘한줌의 재로 사라지다니, 제기랄! 근데 왜 이렇게 우울하지?’
현재 세계의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자연재해는 일상적인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였고, 사람들이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재해의 종류도 다양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건조화가, 또 어떤 지역에서는 정반대로 비나 눈이 너무 많이 내려 큰 피해를 입었다. 홍수와 해일에 의한 피해, 녹아내리는 빙하 때문에 생기는 환경문제와 생태의 변화 등은 이미 익숙한 피해였고, 지진이나 화산 폭발 등에 의한 피해를 입고 있는 지역도 속출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중세에나 있을 법한 각종 전염병들이 도처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어떤 전염병은 현대의학으로 치료나 통제가 가능했지만, 몇몇 종류는 그 발생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고, 주로 기본적인 인권이나 최소한의 생존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은 저개발국 위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기본적인 치료법은 물론 백신도 만들 수 없었고, 사람들은 치료가 불가능한 전염병의 출현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 모든 현상들이 단순히 살아있는 지구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인간들의 고통과 피해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었다.
TV를 틀어도, 인터넷을 들어가 봐도 연일 사건과 사고가 이어지는 요즘, 연호는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처럼, 불쾌한 현실의 모습들이 조금씩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냥 어려서부터 그런 기질이 있었다고 넘기기에는 우울함의 정도가 지나쳤다. 악몽은 더 심해졌고, 현실을 직시하는 눈은 흐려지고 있었다. 또한 연호의 잠재의식 깊숙한 곳에서만 숨어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철원 지역의 어느 강가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생생히 목격했다. 두 사람은 부부였다. 제법 수심이 깊은 곳에서 수영을 하던 여자가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는지, 격렬히 몸부림을 치면서 급류에 휘말렸고, 뭍에 있던 남자는 여자를 구하려고 앞뒤 재지 않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함께 휩쓸려 내려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여자가 수영 선수 출신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얼굴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가족과 가까이 있었고, 어디서 왔는지, 수영은 할 줄 아느냐며 나에게 말을 시키기까지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내 의식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지금껏 물가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수영은 물론 목욕탕을 가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다.
중학생이 된 후, 나는 살면서 절대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사고를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교통사고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그 사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내게 안겨 주었다. 한 여학생이(그것도 등, 하교 길에서 늘 마주치던 동네 여학생이) 평소처럼 찻길을 건너다가 과속으로 달려오는 커다란 트럭에 치인 사고였다. 그 엄청난 힘에 의해 튕겨져 나간 여학생의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훼손되어 주변에 흩어져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거의 한 달 정도는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제대로 잘 수도 없었다.
자라면서 나는 단순히 충격, 아니 그 이상의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된 사고를 두어 번 정도 더 겪어야만 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의 어느 날, 친구가 살던 아파트에 놀러갔다가 바로 눈앞에서 그 사고를 목격하고 되었다. 친구가 사는 집, 바로 위층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투신자살을 시도했는데, 복도식 아파트였던 그곳에서 친구와 함께 현관을 나서던 나는 방금 막 투신한, 13층 아래로 떨어진 시신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물이 가득 들어있는 비닐봉지가 터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단지 그곳엔 물대신 피가 담겨져 있었을 뿐. 육신은 허망하기 그지없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여학생의 교통사고를 목격했을 때,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때가 훨씬 더 끔찍하고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었기 때문에 더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지, 당시의 어린 나는, 아니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의 감정 중에 하나로 각인되어 있다. 아무튼 그때도 나는 한동안 음식은 물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넋을 놓고 늘어지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매사에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어릴 적부터 미친놈처럼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며 점점 염세적이고 부정적으로 변해가던 나는, 점점 더 지독한 허무주의에 빠져들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수렁에 빠져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무기력증에 시달리던 때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대학에 막 입학했을 무렵, 우리 가족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어떤 일을 겪게 되었다. 그나마 겉으로는 별 문제없이 해결된 것처럼 끝이 났지만, 이후로 가족들은 어느 누구도 그 일에 대해서는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그것은 가족 간에 암묵적으로 합의된 금기였다......」
어릴 적에 겪었던 몇 가지 경험들이 자신의 성격형성에 끼쳤을 영향들을 객관화 한다며 써놓은 대학시절의 보고서가 문득 떠올랐다. 그것은 교양과목으로 심리학 수업을 들었을 때의 기억이었다. 당시 연호가 수강하던 심리학수업의 담당교수는 외부기관과 협력하여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강생들이 성장과정에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수집하여 현재의 성격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구였다. 그 당시 연호는 그 보고서를 쓰면서 잊고 있던 어렸을 적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었고, 잠재해 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사실 그때는 학점에 눈이 멀어 자신의 실제 기억보다 좀 더 과장되게 과거의 일들을 묘사했었고, 그렇게 쓴 보고서는 교수와 기관의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거의 반 강제적으로 연호를 끌어들였고, 수많은 상담과 실험에 매우 중요한 피실험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의 참가자에게는 참가비도 지급되었기 때문에 그냥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생각으로 실험에 임했다. 그때 기관에서는 연호가 리포트의 마지막에서 언급한 사건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지만, 연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집안에서도 금기시 되는 얘기를 그런 식으로 공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공개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좀 더 진지하게 상담을 받았어야 했어. 그저 뭣 모르고 학점 따고, 용돈 버는데 미쳐서...’
연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가뜩이나 온갖 잡념과 악몽으로 잠 못 이루는 요즘, 세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도 모자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릴 적 일들까지 떠오르면서, 불면의 밤은 더 길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걱정은 끝이 없었다. 근래에는 상현의 증세가 점점 심해져 출근을 하지 못하는 날이 늘어만 갔고, 극심한 통증 때문에 식사는 물론 잠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상현은 가족들 앞에서는 내색하기 싫다며 참고 있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숙희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상현은 올해 들어 일선에서 한발 물러나 창업주로서의 역할만 하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전문경영인을 두어 출판사를 운영한다고 했을 때,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다.
“아직 젊으신데 무슨 소리야, 아버지?”
“아니, 당신은 아직 연호보다 체력은 자신 있다고 늘 그러면서 왜.....”
‘혹시 그때부터 몸에 안 좋은 조짐이 있으셨나?’
한때는 연호의 친구들이 너는 아버지의 출판사를 물려받으면 앞으로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며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정작 상현과 연호는 둘 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가 평생 이루어 놓은 분신 같은 출판사를 아들이란 놈이 고생도 모르고 물려받아 다 말아먹었다는 소리를 듣기는 무엇보다도 싫었다. 연호는 자신의 깜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아버지 회사에는 아예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연민이가 출판 일을 열심히 배워서 물려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어느덧 시간은 새벽 3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절기상으로는 하지를 지나 장마철이어야 하는데, 요즘은 그저 구름만 많이 끼고 흐렸다가 맑아지기를 반복할 뿐, 비가 온다는 소식은 전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습한 대기 속에 불쾌지수만 높아질 뿐이었다.
‘여름인데 대체 비는 언제 오는 거야? 으, 끈끈해.’
에어컨을 켠지가 2시간이 넘어가면서 방안은 완전히 냉동실이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침대위에 누워 있던 연호는 한기를 느끼며 에어컨을 껐다.
‘무슨 몸뚱이가 온도 조절이 안 되냐. 이러다 감기 들면 안 되는데...’
지금은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학생들의 시험이 모두 끝날 때까지는 일요일도 없이 수업을 나가야만 했다. 무슨 일반 회사처럼 대체할 사람도 없었다. 아프면 대책이 없는 직업이었다.
새벽은 우주의 심연으로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잠을 잊고 지낸 수많은 밤, 그 불면의 밤들은 새삼스러울 것 없이 익숙했지만, 요즘 들어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어딘가 모르게 조금씩 달라져가고 있었다. 달리 표현하거나 설명할 길은 없었지만, 그냥 느낌이 그랬다. 대기의 소리가 달라졌다는 것 말고도, 비가 오지 않고 있다는 것 말고도.
‘이러다가 진짜 미쳐버릴 지도 몰라. 이게 다 잠을 못자서 이래.’
연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다니는 무중력의 감정 상태, 약에 취한 사람처럼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1년에 4번, 학원 강사에게 가장 중요한 시험기간,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려면 이 지긋지긋한 무의식의 늪에서 빠져 나와야만 했다. 그는 온힘을 다해 현실로 돌아오려고 애를 썼다. 현실로 돌아오는 방법은 한가지였다. 무조건 잠을 자는 것이었다.
‘잠을 자야만 현실로 돌아올 수 있다니, 뭔 개소리냐 이게.’
하지만 잠들려고 하면 할수록 잠은 그에게서 죽어라고 멀리 도망갔다. 결국 연호는 현실로 돌아오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태곳적부터 밤을 지켜야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우두커니 새벽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맞이했던 새벽의 수많은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무심히 떠도는 대기마저도 그를 괴롭히는 새벽, 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끝없이 떠돌고 있는 이름 없는 원소들의 소리 없는 울부짖음이 연호의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부질없는 생각들로 가득 찬 머릿속, 언제나 결말은 흐릿했고, 허탈함만이 남아 있는 새벽. 이 땅이, 온 하늘이 병들어 시름하는 이 순간, 세상에 누구 하나쯤은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쯤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프고 힘들 때면 가족들이 날 위해서 함께 걱정하고 그러잖아. 그런 거지 뭐.’
갑자기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이제 진짜 미친 것 같다. 오늘로서 학원도 끝이구나. 이래서 오늘 수업을 할 수나 있겠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직까지는 정신이 멀쩡할 때 마지막으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혼자 맘대로 생각하고 뭐든 관찰하기, 그림 그리기, 사진 찍기,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을 관찰하기. 어릴 적 연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늘에 마음을 뺏겨 밤을 지새우곤 했고, 우주에 관한 서적을 읽거나 영상들을 찾아보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때 사준 천체망원경은 지금은 비록 낡아서 사용하진 않지만, 그가 아끼는 가장 소중한 물건 중에 하나였고, 별들의 움직임을 나름대로 기록한 비밀노트 또한 그의 몇 안 되는 보물 중에 하나였다. 연호뿐만 아니라 연정과 연민도 모두 우주와 별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남매들은 어릴 적 지금처럼 무더운 어느 여름밤, 옥상에서 모기향을 펴놓고서는 밤이 새는 것도 잊은 채, 쏟아질 것만 같은 별들을 관찰하며 수선을 떨던 추억들을 저마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연호는 또한 가족들과 함께 수박을 먹으며 처음으로 별똥별을 보았을 때의 그 느낌을 아직도 마음속에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설레는 짝사랑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느낌처럼 그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우와! 아빠, 엄마, 누나! 방금 봤어? 저게 뭐지? 뭔가 반짝하고 지나갔는데?”
연호는 마치 눈밭에서 날뛰는 강아지처럼 몹시 흥분해서 물었다. 상현과 숙희는 눈이 휘둥그레져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연호를 보며 웃었고, 연민은 아직 숙희 품에서 젖병을 물고 있었다. 상현은 연정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네가 연호한테 잘 설명해 줘봐.”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응, 그건 별똥별이라고 해. 다른 말로는 유성이라고도 하지. 별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는데, 저 별들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수명을 다 한 거야. 아니, 너 수명이 뭔지 모르지? 그냥 죽을 때가 됐다는 거야. 그래서 저렇게 멋진 불꽃을 남기면서 죽어가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연호는 세상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나의 얘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웃기지마! 누나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연정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래서 애들하고는 진지한 대화를 할 수가 없어. 너랑은 수준이 안 맞아서 그만 할래.”
상현과 숙희는 아이들을 보며 웃고 있었지만, 연호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별이 죽는다니, 그때까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때부터 우리가 사는 별,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공상에 사로잡혀 남들은 관심도 없는 일에 지나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지구와 우주의 미래를 걱정하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또래의 아이들이 흔히 관심을 가질만한 것들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친구가 많을 리 없었다. 그 흔한 사춘기의 성장통도 거의 없었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연호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성문제나 친구관계 등 인간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없었다. 연호에게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언젠가는 닥치게 될 세상의 종말에 관한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