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이는 바닷물을 다 증발시킬 기세로 강렬하게 내리쬐던 태양이 순식간에 몰아닥친 먹구름에 자취를 감춰버린다. 바다를 집어삼킬 듯 밀어닥쳤던 성난 파도는 쇠막대기같이 굵은 빗줄기를 만나 미친 듯이 더 굽이친다.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엄습하게 하는 큰 너울이 해안가로 끝없이 밀려온다.
바로 그 앞에 수현이 서핑보드에 기대서서 사람들을 바라본다. 태양보다 더 밝은 얼굴로.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고 서 있다.
‘18세 소년, 파도에 휩쓸려 실종’, ‘서핑강사였던 18세 소년, 강습 중 바다에서 사체로 발견.’ 등등의 헤드라인으로 전국 뉴스와 온 포털 사이트 메인에 자신의 얼굴이 도배될 뻔했단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현은 알을 깨고 나온 새 마냥 생전 처음 맞이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여유도 잠시, 수현은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사람들에게 깔려 애정 어린 손길과 욕설을 받아내며 모래투성이가 된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워 자신을 걱정해준 사람들을 향해 진심으로 행복한 얼굴로 괜찮다며 손을 흔든다.
“아이고 제가 뭐라고 하던 일까지 미뤄두고 이렇게까지 다 나오셨어요? 저 손끝 하나 안 다친 거 보이죠? 진짜 괜찮으니깐 하던 일 하러 들어가셔도 됩니다. 걱정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열여덟 나이에 걸맞는 수현의 귀엽고 씩씩한 멘트에 해안가를 둘러싸고 있던 구경꾼들부터 도로에 멈춰서 있던 차량까지, 순식간에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김수현! 너 일주일간 강습금지야.”
수현이 와이키키 회원들에게 둘러싸여 영웅대접을 받으면서, 무섭지 않았냐? 파도 안에서 어떻게 나왔냐? 발바닥에 본드가 붙었냐? 어떻게 보드가 발바닥에서 안 떨어지고 어마어마한 그 파도를 뚫을 수가 있었냐? 등등 쏟아지는 각종 질문에 일일이 답하는 사이, 태식의 잔뜩 화가 난 목소리가 아직 100피트 파도타기의 감흥에 젖어있는 수현에게 찬물을 확 끼얹어버린다.
“아 형님! 저 진짜 괜찮아요. 봐요. 다친 곳 하나 없다니깐요. 긁힌 자국도 없어요. 형님~”
“김병진, 너도 내 말 들었지? 수현이 앞으로 짜인 일주일 강습스케줄 너랑 민지, 동건이 셋이서 나눠서 해.”
태식이 쌀쌀맞은 태도로 수현의 앞을 휭 지나간다. 수현이 강제로 태식을 멈춰 세워 놓고 멀쩡한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보여줘 봐도 태식은 수현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수현의 팔을 뿌리치고 냉랭하게 가게로 들어가 버린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태식의 뒷통수에 대고 병진이 일부러 더 목소리를 키워 답한다. 수현은 도대체 뭐가 잘못인지 모르겠다는 퉁명스런 얼굴로 애꿎은 모래를 발로 헤치며 씩씩거리고 서 있다.
“입 좀 집어넣지? 김수현, 너 죽을 뻔했어. 네가 한 행동이 정당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 사실 하나 자체로 넌 잘못을 저지른 거야. 서핑강사는 단순히 수강생에게 서핑만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야. 서퍼로서의 기술적인 능력은 후자의 문제야. 자신의 안전과 수강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췄냐가 전제되어야만 서핑강사를 할 자격이 주어지는 거야. 그런 면에서 넌 실격이야. 그렇기 때문에 태식이 너한테 내린 일주일 간 강사활동 금지는 너무나 정당한 지침이야.”
항상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실없이 허허실실 거리던 병진은 어디가고, 태식의 말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삭이고 있는 수현을 병진이 아주 진지하고 단호한 태도로 꾸짖는다.
서퍼들에겐 로망인 백피트 파도타기를 성공한 수현을 축하하기위해 서울에서부터 챙겨온 샴페인을 들고 나와 축배를 들려던 와이키키 회원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한다.
“고개 들어. 김수현, 고개 들라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든 수현이 여전히 퉁명스런 얼굴로 병진을 바라본다.
강습 중에 개인의 유희를 위한 서핑이 금지사항이라는 것쯤은 수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에 있어선 FM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이는 수현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수현이 생각했을 때 자신이 한 행동은 금지사항에 적시된 내용이 아니라, 수강생들의 열렬한 바람에 의해 행해진 일종의 안내교육 같은 것이었다. 서핑의 고급단계까지 올라가면 이렇게 탈 수 있다는 것을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같은 것이었단 말이다.
“뭐가 그렇게 이해가 안 되고 불만인데? 말해봐.”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넌 항상 이런 식이지? 항상 괜찮고, 항상 문제없고, 항상 좋고. 그런데 아니잖아. 특히 지금은 더 아니잖아. 말을 해. 물론 서른도 훨씬 넘은 늙다리 같은 나한테 네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렇다고 네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우리 사이에 대화는 없고 명령만 있게 되는 거잖아. 뭔가 부당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병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수현의 키에 맞춰 몸을 낮추고 수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수현은 입에 자물쇠를 달았는지 숨 한번 내뱉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나 비 맞는 거 좋아하는데 잘 됐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동생이랑 같이 비도 맞고. 꽤 로맨틱한데?”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심산인지, 병진이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칠 준비가 된 바다를 바라본다.
굵은 빗줄기에 모래사장이 푹푹 패이다 못해 바다에 사정없이 쓸려가고 있는 상황인지라 비를 맞고 선 두 사람의 모습은 로맨틱하기는커녕 재난영화에 가까운 상황이다.
“형님 천식환자잖아요.”
“내 생각 끔찍이도 해주시네.”
“들어가요. 저 진짜 괜찮아요. 이제 그만 들어가요. 형님 저번처럼 응급실 실려 가면 어떡하려고 그러세요.”
수현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병진을 일으켜 세워보지만, 병진은 모래에 박혔는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천식환자인 탓에 태식의 배려로 지상강습을 전담으로 맡아서 하는 병진은 비나 찬바람, 미세먼지에 특히나 취약했다. 이 사항을 잘 아는 양브로샵 직원들은 빗방울만 떨어지면, 강습 중에도 수강생보다 병진을 먼저 챙겼었다.
“사람 말을 왜 이렇게 안 믿으세요?! 저 괜찮다고요! 괜찮으니깐 빨리 들어가자고요! 저 같은 놈이 하는 말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형님 건강까지 해쳐가면서 이렇게 버티시는 거예요? 빌어먹을. 제 말이 말 같지 않으세요? 좀 들어가라고! 야, 김병진! 내 말 안 들려!?”
수현의 지랄발광에도 보란 듯이 파안대소를 하던 병진이 순식간에 의식을 잃고, 하얗게 질린 수현이 단번에 병진을 들쳐 업고 가게를 향해 전력질주 한다.
“형님 죄송해요. 제가 잠깐 어떻게 됐었나 봐요. 형님 제 말 들리죠? 들려야 해요. 형님? 형님! 절대로 의식 잃으면 안 돼요. 형님!”
눈물과 빗물에 범벅된 얼굴로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목청을 높이는 수현의 목에 둘러져있던 병진의 팔이 갑자기 강하게 조여 온다.
“야 이 새끼야.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알아? 남자 새끼가 호들갑은.”
“형님? 형님 제 말 들려요?”
수현이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에 업혀있는 병진을 살핀다.
“어우 춥다. 더 빨리 달릴 수 없어? 너 백 미터 몇 초야? 나 때는 말이야.”
“형님 지금 장난이 나옵니까? 형님이야말로 진짜로 죽을 뻔 했다고요!”
병진은 머쓱한 지 괜히 수현의 목을 더 꽉 끌어안는다. 그리고 수현의 귀에 들릴 듯 말 듯 “고맙다”는 말을 속삭이고, 도대체 가게에 언제 도착 하냐며 일부러 더 수현을 재촉한다.
사실 병진은 모든 사람들을 항상 웃는 낯으로만 대하는 수현이 늘 안쓰러웠다. 불우하게 자란 탓에 그 때가 깊숙히 박혀있던 병진은 이를 감추기 위한 방법으로 항상 남들 앞에서 웃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숨기며 최대한 예스맨으로 살아왔었다.
그땐 그것이 편하고 맞다 생각했었다. 그 덕분에 괜한 오해를 사서 싸움을 일으키거나, 싸움에 휘말리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남에게 미움을 살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없어져 버렸다. 돌이켜보니 병진이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 병진은 마음의 병을 안고 전국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렇게 양양까지 흘러왔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태식을 만나 양양에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병진은 아직 열여덟 밖에 되지 않은 수현이 자신처럼 살지 않길 바랬다. 그래서 늘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렸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거면 됐다."
"네?"
맥락에 맞지 않는 병진의 혼잣말에 수현이 바로 반응한다.
병진은 수현이 자신의 감정을 토해낸 것만으로도 됐다고 생각했다. 첫 결실로 꽤나 괜찮다고 생각했다.
댐이 무너지는 것은 검지 손가락이 오갈 수 있는 아주 작은 구멍이면 충분하단 걸 병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양브로샵 안에 화목난로가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와 빗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린다.
2박3일 일정으로 왔던 와이키키 서핑동호회원들은 태풍이 원래 예보와 달리 일찍 올라와 오늘부터 내일모레까지 대한민국이 태풍의 영향권 아래에 있으니 물과 관련된 활동에 주의를 당부한다는 뉴스속보에 서울에서 챙겨온 각종 주류와 안주를 기증하고 서둘러 서울로 떠났다.
화목난로 앞에 태식과 민지, 동건, 진호가 빙 둘러앉아 코코아를 마시고 있다.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고 평온이 내려앉은 모습이다.
“병진형님은 괜찮겠죠?”
수현의 추천으로 작년부터 양브로샵에서 일하게 된 동건이 걱정스런 낯빛으로 불길이 잦아든 난로를 응시하고 있다.
“수현이하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비가 그렇게 쏟아지는데도 위험하게 밖에서 그렇게 있었던 거야?”
자신도 알바하게 해달라고 수현을 조르고 졸라 올해 초부터 양브로샵의 막내로 일하고 있는 민지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컵을 만지작거린다.
“그러게. 병진이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수현인데, 그런 애가 비가 오는데도 병진이랑 같이 한참을 비를 맞다 왔다는 게... 나도 나를 모르는데, 내가 남의 속을 어찌 알까요? 기침소리 안 나는 걸로 봐선 병진이 상태가 작년처럼 그렇게 위험한 상태로 옮겨갈 것 같진 않다.”
태식은 이 모든 일이 다 자기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수현이 중2였을 때 만난 이래, 지난 3년 동안 태식은 수현에게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친 적이 없었다. 워낙 알아서 잘 하는 아이기도 했지만, 수현을 아들로 생각하고 진심으로 아꼈기에 태식은 수현에게 의식적으로 더 화를 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그 신뢰가 깨진 것이다. 정확이 말하면, 태식이 깨버렸다. 태식은 그렇게 해서라도 수현을 지켜야만 했다.
바다를 좋아하는 만큼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태식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서핑을 배우면서 절친한 사람을 여럿 잃었던 터라 태식은 자식 같은 수현을 잃고 싶지 않았다. 심장이 바닥에 내리 꽂혀 수명이 30년은 단축된 듯한 오늘과 같은 경험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비에 젖은 생쥐꼴로 들어온 수현이 오한증상을 보이며 온 몸에 힘을 잃고 쓰러져 진호의 방으로 업혀가는 동안에도 태식은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애써 외면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수현에게 바다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려 했다.
그러나 ‘말 안 해도 알겠지...’ 라는 여유넘치는 생각과 달리 모닥불을 바라보는 태식의 얼굴엔 미안함과 초조함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