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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열여덟 스물아홉
작가 : 애플타이거
작품등록일 : 2020.9.30

열여덟, 양양, 한여름, 새파란 바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2주간 전부를 나눈 수현과 진호가 11년 후, 청춘의 끝자락에서 재회한다.

 
10. 각자의 공간
작성일 : 20-09-30 15:40     조회 : 274     추천 : 0     분량 : 8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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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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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문객들을 버스에 태워 보내고, 수현과 병진이 운구차에 몸을 싣는다. 두 사람이 잠든 사이, ‘양브로’ 간판이 걸린 새하얀 건물 앞에 차가 멈춰 선다.

 

  도착했다는 기사의 말에 수현과 병진이 허둥지둥 차에서 내린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는 병진 옆에 수현이 꿈에 젖은 얼굴로 서 있다.

 

  “여기만 시간이 멈춰있었나 봐요.”

 

  “나 늙은 거 안 보이냐? 네가 그만큼 여기가 그리웠던 거겠지. 밥부터 먹자. 집 밥 오랜만이지? 삼십 분만 줘. 그동안 넌 바다랑 회포 좀 풀고 있어.”

 

  “네.”

 

  서핑거리의 터줏대감인 양브로 샵을 중심으로 서핑샵부터 카페, 식당 등등 다양한 가게가 늘어선 거리를 뒤로하고 수현이 길 건너편 방파제에 성큼 올라선다.

 

  수현의 기억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핑크빛 노을이 바다를 뒤덮고 있다. 수현과 비슷한 또래이거나 별 차이 안 나는 젊은 남녀들이 바닷가를 가득 메우고 있다.

 

  수현만 홀로 아무도 찾지 않는 방파제에 앉아 일몰을 감상한다. 수현이 담배가 든 안주머니를 더듬거린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는데 없다. 전날에도 라이터가 없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자켓 바깥 주머니도 뒤적거리는데 수현의 손에 뭔가 잡혀 올라온다.

 

  듀퐁라이터.

 

  수현은 지금까지 판촉물로 나오는 공짜 라이터만 써 왔다. 수현의 한 달 식비에 맞먹는 고급라이터는 살 생각조차 한 적 없다.

 

  “이게 왜?”

 

  묵직한 무게만큼이나 번쩍거리는 비주얼을 가진 라이터를 수현이 퉁명스럽게 살펴본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라이터 바닥 부분에 뭔가가 음각이 돼있다.

 

  “양. 진. 호. 양진호?”

 

  수현의 입매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삐죽거리다 위로 슬쩍 올라간다. 수현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마치 진호가 붙여주는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다.

 

  담뱃대가 줄어드는 동안 수현이 만질 수 없는 진호 대신 라이터를 매만진다.

 

 

 

 

  수현의 손에 든 라이터의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 반복한다. 문가에 기대선 수현이 선뜻 방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애꿎은 라이터만 괴롭힌다. 시선은 라이터에 고정되어 있지만, 흘깃흘깃 방을 훔쳐보는 그의 눈에 긴장감이 가득한다.

 

  땅- 굳게 닫힌 라이터의 뚜껑이 다시 열리지 않고, 수현의 안주머니로 들어간다. 수현이 두 손바닥을 비비다 뒷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방안에 들어간다.

 

  건물 지붕이 삼각형 모양으로 뾰족한 탓에 어린 시절 누구나 꿈꿨을 법한, 비밀의 장소 같은 분위기를 풍겼던 11년 전 진호의 방이 예전과 같은, 그 모습 그대로 수현을 맞이한다.

 

  진호가 이 방을 쓰기 전에 태식은 수현에게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네 나이의 아이들이 꿈꾸는 방은? 좋아하는 색은? 유치한 건 안 좋아하지? 인형은 어때? 등등. 수현이 눈에 띌 때마다 태식은 밤새 적은 질문리스트를 끈질기게 물고늘어졌다.

 

  그러나 진호는 이 방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무로 마감처리 된 벽면엔 대형 세계지도와 체게바라 포스터가 붙어있고, 선반엔 지구본, 나침반, 망원경 등이 장식돼 있어 모험심 많은 아이로 성장하기 바라는 미취학 아동을 둔 부모의 야심이 반영된 방을 연상시킨 것도 모자라 스포츠카 모양의 침대와 아이언맨 이불보까지, 어느 것 하나 조숙한 취향을 갖고 있던 진호를 만족시켜주는 구석이 없었다.

 

  “완전 좋은데? 야 부럽다. 내 방은 이불장 하나 밖에 없는데.”

 

  “그럼 네가 써.”

 

  태식의 부탁에 더 오버하긴 했지만, 수현은 진심으로 이 방이 마음에 들었었다. 그러나 진호는 짐도 풀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었다.

 

  “무슨 큰 기대를 했나본데, 애초부터 난 여기에 묵을 생각으로 온 게 아녔어. 부담스럽게 왜 이렇게 오버를 한 거야? 그러니깐 괜한 기대하지 마. 유학 가기 전에 할머니가 하도 아빠 얼굴 보고 오라고 잔소리해서 그 소리 듣기 귀찮아서 온 것뿐이야. 그리고 할머니가 전해달라는 물건이 있어서 그거 갖다 주러 온 것뿐이라고.”

 

  “아... 오랜만에 아들 볼 생각에 너무 들떠서 나도 모르게 오버를 좀 했네. 무슨 물건이야? 할머니는 별말 없으셨는데. 택배로 보내지 그랬어. 힘든데 뭐 하러 무겁게 들고 왔어.”

 

  “그럼 도로 가져가? 내가 보고 싶지도 않은데 괜히 찾아와서 아빠 귀찮게 했구나? 그냥 물건만 틱 보내면 끝났을 일인데, 구질구질하게 나까지 왔나 보네?”

 

  온몸에 가시가 돋친 진호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기만 한 태식과 달리 진호의 태도는 지켜보는 옆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쉴 새 없이 널뛰었었다. 이제 막 사춘기가 찾아온 소년마냥 비위를 맞출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여기서 안 자면 어디서 자게? 병진이나 내 방은 침대도 없어. 너한테는 그나마 여기가 편할텐데... 오늘만 여기서 자면 안 될까?”

 

  “너네 집 어디야?”

 

  “어?”

 

  “너네 집 어디냐고. 여기서 머냐고. 나 자도 되냐고. 지금 묻고 있잖아. 대답 좀 빨리 할 수 없냐 넌.”

 

  태식과 진호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서 있던 수현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눈만 깜빡거렸었다.

 

  “수현아 복순할매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드릴게. 오늘 하룻밤만 좀 부탁하자. 어? 제발.”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던 수현에게 태식은 답도 듣지 않고 고맙다며 눈을 찡긋거리고 다급하게 병진을 깨우러 방을 나섰었다. 사실, 태식은 교통사고 트라우마로 운전대를 놓은 지 오래였다.

 

  “너 얼굴이 좀 그렇다? 싫어? 싫으면 말해. 지금이라도 서울 가면 돼.”

 

  “돈도 없는 놈이.”

 

  “트렁크 속에 돈 있거든?”

 

  “씨알도 안 먹히는 말 그만하고 조용히 따라오기나 해.”

 

  “야 손 펴봐.”

 

  뒤돌아서 방을 나서는 수현을 진호가 짓궂은 얼굴로 불러 세웠다.

 

  “방값은 받아야지. 내가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

 

  그때 수현의 손바닥 위에 놓였던 남미 나체석상이 지금 수현의 눈앞에 보이는 선반 위에 진열돼있다.

 

  싫다고 입버릇처럼 툴툴거렸었지만, 진호는 이 방을 누구보다 좋아했었다. 그리고 수현은 이방에 들어오길 갈망했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롯이 둘만 남겨졌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만들어주는 이 방에서 진호와 함께 할 그 순간을 늘 갈망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꿈이 이뤄진 그 밤 이후, 11년이 지난 지금, 수현은 혼자 진호의 침대 위에 누워있다.

 

  “수현아, 밥 먹어!”

 

  병진의 외침이 벽면을 맞고 그대로 창문 밖으로 튕겨나간다. 그리고 이내 진호가 썼던 침대에 몸을 뉘인 수현이 깊은 잠에 빠진다.

 

 

 

 

  복순할매는 아홉시만 되면 최면에 걸린 듯 바로 잠에 들었다. 불이 모두 꺼진 어둑한 집 안에 복순할매의 코골이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누가 잡아가도 모른다는 말과 딱 맞는 상황이다. 이가 안 맞는 철문을 열고 수현이 들어온다. 그 뒤로 진호가 들어올 생각을 않고 뻣뻣하게 서 있다.

 

  “안 들어오고 뭐해?”

 

  “이게 집이야?”

 

  “그럼 돼지우리냐?”

 

  아파트 생활에 익숙한 진호는 전형적인 어촌 주택형태를 띠고 있는 수현의 집이 낯설기만 한데, 불까지 모두 꺼져있어 오싹하기까지 하다.

 

  “너 잡아갈 귀신같은 거 없으니깐 유난 그만 떨고 빨리 들어와.”

 

  수현이 마루 위로 성큼 올라가 전등을 켠다. 그제야 소담한 집안 풍경이 진호의 눈에 들어온다.

 

  담벼락을 따라 꽃나무가 심어져있고, 그늘막 아래 놓인 평상 위엔 복순할매가 작업하다 만 어망이 펼쳐있다. 부엌 겸 거실로 사용하는 마루에는 오래된 냉장고와 찬장이 나란히 서 있고, 싱크대 반대편 벽면은 수현의 성장기를 한 눈에 보여주는 사진들과 그가 받아온 상장이 도배 돼있다.

 

  “바본줄 알았는데 꽤 했는데? 잠깐. 뭐냐. 성실한 바보잖아? 어떻게 공부랑 관련된 상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어? 개근상, 봉사상, 효도상... 효도상? 이런 상도 있어? 공부 못하는 애한테 꿈과 희망을 잃지 말라는 거야 뭐야. 너무 억지인 거 티 다 나는데? 호박! 너 왜 이렇게 역변했냐? 혼자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거야? 어릴 때는 그래도 좀 귀여웠네. 그런데 지금 그 얼굴은 뭐야. 연애는 해봤냐? 연애라는 게 뭔지는 알아? 고백은 받아봤고? 찌질한 걸로 봐선 좋아하는 사람 있어도 절대 고백 같은 거 못 할 놈인데 말야.”

 

  “병 있어? 벽보고 혼자 뭘 그렇게 떠들어. 복순할매 깨면 피곤하니깐, 그만 떠들고 들어와서 자기나 해.”

 

  수현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을 잡고 서있다.

 

  “너네 할머니 잠들면 도둑이 들어와도 모르신다며. 12시도 안 됐는데 뭐 벌써 자. 그렇게 졸리면 너나 자.”

 

  “이불 다 펴 놨으니깐, 자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

 

  눈에 피곤이 가득한 수현이 진호를 내버려두고, 마루에서 내려가 평상 위에 있던 어망을 바닥으로 밀쳐놓고 대자로 드러눕는다.

 

  “멀쩡한 집 놔두고 왜 거기서 자냐?”

 

  “여기가 더 시원해. 나 이제 잘 거니깐 말 시키지 마.”

 

  “씻지도 않고 그냥 잔다고? 좀 씻지?”

 

  자신 때문에 수현이 마당으로 쫓겨 갔나 싶은 마음에 진호가 슬쩍 수현의 기색을 살피다 방 안으로 들어간다. 수현의 말 대로 이불장 하나만 달랑 있는 휑한 방 안에 진호를 위한 꽃분홍색 침구가 깔려있다. 침구 위엔 진호가 쓸 세면도구와 수건, 갈아입을 옷이 놓여있다.

 

  “지는 씻지도 않으면서 남 걱정은 끔찍이도 하네. 아무리 봐도 우리 할머니보다 잔소리가 한 수 위야.”

 

  진호가 팬티 차림으로 수현이 챙겨준 용품을 챙겨 수현의 방과 연결된 화장실로 들어간다. 샤워기 소리와 진호의 콧노래가 평상에 누워있는 수현의 귀에 그대로 와 닿고, 딸기향 바디워시 냄새가 수현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늘막 사이로 반짝이는 별빛이 수현의 얼굴에 닿는다. 수현이 천천히 눈을 뜨고 가만히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느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잔다며?”

 

  진호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평상 끝에 걸터앉는다.

 

  “네가 좀 시끄러웠어야지. 너야말로 어디 가서 노래하지 마라. 참고로 귀 썩기 직전에 노래 끊어줘서 고맙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고 옆으로 좀 가봐.”

 

  진호가 불도저처럼 수현을 평상 끝으로 밀어내고 대자로 드러눕는다. 수현이 벌떡 일어나 앉아 진호를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본다.

 

  “미친새끼 진짜. 너 뭐하냐.”

 

  “잘 거야. 말 시키지 마.”

 

  “기껏 이불까지 펴놨는데, 왜 여기 나와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어. 들어가서 자라고.”

 

  “여기가 더 좋아. 시원하고. 네가 그럼 그렇지. 나한테 좋은 걸 줄 리가 없지.”

 

  “또라이. 모기 물려도 나한테 뭐라 하지 마라.”

 

  세상 편안한 얼굴로 누워있는 진호 옆으로 수현이 나란히 눕는다. 평상은 여름만 되면 수현의 전용침실로 변모했다. 수현이 워낙 열이 많은지라 방에서 창문을 열고 자는 것과 사방이 뚫린 마당에서 자는 것은 질적으로 달랐다.

 

  “내일 뭐 하냐.”

 

  “알바.”

 

  “무슨 알반데? 고기 잡으러 가냐?”

 

  “태식이형님 가게에 서핑 배우러 온 사람들한테 서핑 가르쳐주고 있어.”

 

  “네가? 너 같은 바보가?”

 

  “머리 쓰는 일은 못해도 몸 쓰는 일은 잘 하거든?”

 

  “야 지금 그 말 좀 야했다?”

 

  “또라이 새끼. 좀 자지?”

 

  “자지?”

 

  “나 잔다.”

 

  “여자친구 있냐? 내가 지금 널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나?”

 

  잘만 하면 윙윙거리는 모기처럼 진호가 얕게 잠든 수현의 잠을 훼방 놓으며 잘 틈을 주지 않는다.

 

  “나 진짜 졸려.”

 

  “안에 들어가서 자.”

 

  “여기가 내 전용 침실이거든? 그리고 나 인기 개 많아.”

 

  “뭘 보고?”

 

  “내 몸 안 보이냐?”

 

  매끈한 진호의 몸과 달리 수현의 몸은 부위마다 근육이 단단하게 잡혀 남성미가 물씬 느껴진다.

 

  “그런데 너 진짜 내일 갈 거야?”

 

  “왜?”

 

  “태식이형님은 너 꽤 있다 가는 줄 아시던데.”

 

  “넌 어떤데?”

 

  “내 의견이 중요해?”

 

  “그럴 리가.”

 

  진호가 슬쩍 웃음을 흘리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편다. 수현도 질 세라 몸을 위아래로 길게 늘이는데, 두 사람의 손끝이 맞부딪친다. 순간, 두 사람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나란히 누워있던 두 사람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 등을 지고 새우자세로 몸을 웅크린다.

 

  숨죽인 채 조금의 미동도 없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오간다. 대화가 뚝 끊긴 정적 위로 그늘막이 바람에 요동친다. 어스름이 걷히기 시작하고, 해가 뜬 새파란 새벽하늘 아래 등을 지고 누워있던 진호와 수현이 마주보고 누워있다.

 

  첫닭 소리에 방문이 열리고, 복순할매가 작업복 차림으로 나와 마루에 걸터앉는다.

 

  “저렇게 자다가 언젠가 입 돌아가지 돌아가. 누굴 닮아서 말을 저리 안 듣는지. 수현아, 방에 들어가서 자. 야 이놈아! 옴마야? 저 놈은 누구데? 처음 본 놈인데. 뉘 집 자식인지 귀티 꽤나 나게 생겼네.”

 

  진호를 뒤늦게 알아차린 복순할매가 평상 아래에 떨어져 있는 어망을 줍다말고 금은방 케이스에 든 보석을 바라보듯 황홀한 얼굴로 진호를 구석구석 살핀다.

 

  복순할매의 쭈글쭈글한 손이 진호의 탱탱하고 허연 피부 여기저기에 닿고, 밤새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친 진호는 당연히 모기이겠거니 생각하고 복순할매의 손이 닿을 때마다 손바닥으로 탁탁 쳐내기 바쁜데, 복순할매가 그런 진호의 손을 잡아채 등짝을 후린다.

 

  “안 인나!”

 

  복순할매의 매서운 손맛에 진호가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찌릿한 고통에 벌떡 일어나 앉는다.

 

  “누구세요?”

 

  “누구세요? 인사 안 하냐? 어린놈이 아직 정신이 덜 돌아왔네. 그럼 또...”

 

  복순할매의 손이 올라가는 모습에 진호가 벌떡 일어나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할매 진짜. 잠 좀 자자. 잠 좀!”

 

  무슨 상황인지 정리 좀 하라는 듯 진호가 수현을 발로 툭툭 건들어 보지만, 수현은 입만 움직일 뿐 꿈쩍하지 않는다.

 

  “친구를 데리고 오면, 온다! 말도 못해?”

 

  “태식이형님 아들이야.”

 

  진호는 여전히 허리를 굽힌 자세로 서 있고, 수현은 어망을 끌고 와 귀를 막고 억지로 잠을 이어가는데, 복순할매가 아차 싶은 얼굴로 진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쥐고 찬찬히 훑는다.

 

  “네가 태식이 아들이라고? 진짜?”

 

  복순할매의 기세에 눌린 진호가 세상 순수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만 빠르게 끄덕인다.

 

  “나한테 거짓말 하면 뼈도 못 추린다? 진짜야?”

 

  “네!”

 

  “그런데 어떻게 닮은 구석이 없냐?”

 

  “할머니 닮았습니다!”

 

  “엄마도 아니고 할머니 닮았단 사람은 첨 봤네. 편하게 앉아. 밥은?”

 

  시간불문하고 집을 찾아온 손님에겐 무조건 밥을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 복순할매의 지론인지라 이제 막 어스름이 걷힌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복순할매는 진호의 답을 듣지도 않고 장화를 벗어던지고 마루로 올라가 가스레인지에 불을 켠다.

 

  “야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냐?”

 

  이 상황이 너무 익숙한 수현과 달리 진호는 난감하기만 하다. 눈꺼풀이 사정없이 내려앉는 것을 참고 마루로 올라가 복순할매를 도와야 하는지, 아니면 이미 수저까지 놓인 밥상 앞에 멀뚱히 앉아있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본능대로 잠을 잘지...

 

  “밥상 앞에 앉아서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복순할매가 차려주는 대로 다 먹는 게 네 신상에 좋을 것이다. 그럼 난 이만.”

 

  수현이 어망을 이불삼아 끌어안고 다시 잠에 든다. 진호가 아무리 발길질을 하고 손으로 찔러도 꿈쩍하지 않는다.

 

  “이쁜아~ 와서 밥 먹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냉장고에 있는 걸로 대충 차렸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이쁜아라는 호칭에 수현이 자다 말고 보란 듯이 비웃음을 터트리고, 진호는 복순할매의 손에 이끌려 해산물 뷔페에 버금가는 12첩 밥상 앞에 앉는다.

 

  “올 줄 알았으면 더 맛있게 해줬을 텐데. 찬이 모자라서 어떡하나. 그래도 맛있게 먹어줘. 태식이아들이면 내 손주나 마찬가지지 뭐.”

 

  “아 네...”

 

  진호가 밥을 풀 때마다 복순할매가 손으로 찢은 김치며 마른 생선조림 등등이 척척 올라간다.

 

  “어떻게. 입에 좀 맞아?”

 

  “해산물 안 좋아하는데, 이건 맛있네요.”

 

  “그래? 그럼 매일 와. 내가 매일 해줄게. 태식이네 집은 손님들로 시끄럽잖아. 우리 집이 조용하고 좋지. 수현이 놈도 있고. 둘이 나이가 같나?”

 

  “아 네.”

 

  음식 맛있다는 칭찬을 제일 좋아하는 복순할매의 입이 귀에 걸려있다. 미자가 노량진 시장에 가서 아무리 값비싼 해산물을 사와도 입만 조금 댈 뿐 해산물 특유의 비린내 때문에 쳐다보지 않는 진호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복순할매의 음식은 진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입에 맞았다.

 

  진호가 금세 밥 한 공기를 다 비우고, 한사코 그만 두라는 복순의 말에도 불구하고 싱크태 앞에 서서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그릇을 닦는다.

 

  “이렇게 맛있는 밥을 차려주셨는데 이것도 안 하면 안 되죠. 뒷정리는 제가 할 테니깐 일 나가셔도 되요. 저 때문에 괜히 늦은 거 아니세요?”

 

  “아이고 태식이아들이라고 하더니 말 하는 게 어쩜 지 아빠랑 이리 똑같을까. 수현아! 들었냐? 네 놈도 말 좀 이렇게 이쁘게 하면 어디가 덧난다냐? 안 자는 거 다 아니깐 얼른 와서 도와! 남의 집 귀한 아들 설거지 시키는 것도 미안한데 네 친구 손에 주부습진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등짝 후려치기 전에 일어나라. 할매 지금 장화 신는다.”

 

  복순할매의 불호령에 수현이 굼뜨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퉁퉁 부은 얼굴로 마루에 올라선다.

 

  “얼굴이 왜 이렇게 부었데? 안 그래도 작은 눈 더 작아진 거 봐. 이 화상아, 이쁜이 하는 거에 반의반이라도 좀 보고 배우고 있어. 할매 간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에 얌전히 설거지 중이던 진호가 냉큼 고무장갑을 벗어 수현에게 던져버리고 마루에 대자로 눕는다.

 

  “나 잔다.”

 

  수현의 입에서 욕지거리 대신 웃음이 새나온다. 진호를 안 지 하루 밖에 안 됐지만, 수현이 겪은 양진호란 놈은 마음에 없는 행동이나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억세기로 유명한 복순할매의 비위를 맞춰준 것도 모자라 고된 어망손질을 하러 나가는 복순할매의 기분까지 살뜰하게 챙겨준 것이 수현은 그냥 고마웠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그새 깊이 잠든 진호의 몸 위로 꽃분홍 이불이 덮이고, 복순의 지침대로 뒷정리를 모두 마친 수현은 진호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철문을 닫고, 때 이른 출근길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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