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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열여덟 스물아홉
작가 : 애플타이거
작품등록일 : 2020.9.30

열여덟, 양양, 한여름, 새파란 바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2주간 전부를 나눈 수현과 진호가 11년 후, 청춘의 끝자락에서 재회한다.

 
7. 간극
작성일 : 20-09-30 15:38     조회 : 294     추천 : 0     분량 : 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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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에 태식이 다니던 교회신도들이 조문을 마치고 떠난 뒤 다시 정적에 잠긴 빈소 안에 진호와 수현, 병진이 나란히 벽에 기대 앉아있다. 진호의 왼쪽 팔뚝에 띠가 두 줄인 상주 완장이 채워져 있다. 아들로서 태식의 유일한 직계가족인 진호 옆으로 아들 같았던 수현과 태식의 마지막 가는 길을 목격한 병진이 띠가 한 줄인 완장을 차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 좀 드세요.”

 

  가슴골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초미니 원피스 차림의 민희가 쟁반에 물 세잔을 들고 와 병진에게 먼저 내민다. 원피스 색깔이 검정색이라는 것 말고는 빈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다.

 

  “아이고 네... 그나저나 감기 걸릴까 걱정되는데 걸칠 옷이라도 좀...”

 

  “한여름에 무슨 감기요~ 지금까지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는 강철체력이니깐 걱정 마세요.”

 

  눈치 없는 민희는 병진의 의도를 1도 알아채지 못하고, 수현과 진호에게 차례로 물을 건넨다.

 

  “차키 줬잖아. 왜 아직도 안 갔어?”

 

  “오빠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당연히 옆에 있어야지. 먼저 가는 게 말이 돼? 발인 마치고 장지까지 같이 갔다가, 서울 올라갈

 때는 내가 운전할 테니깐 걱정 말아.”

 

  “네가 왜? 뭔데? 너 지금 주제넘었어.”

 

  “치. 오빠가 아무리 그래도 난 안 가네요.”

 

  진호가 귀찮은 얼굴로 생기발랄한 민희를 밀어낸다. 거의 무시에 가깝다. 당사자가 아닌 수현과 병진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민망할 지경인데, 민희는 괜찮은 건지 괜찮은 척 하는 건지 더 밝은 얼굴로 진호의 안색이 좋지 않다며 눈 좀 붙이고 오라고 진호의 팔을 끌어당긴다.

 

  “여기가 술집인 줄 알아? 장소 가려가면서 행동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가. 여기에 데리고 온 것만 해도 너에게는 충분히 과분한 일이었어.”

 

  “하하하. 우리 오빠가 이렇게 짓궂어요. 아 맞다. 우리가 술집에서 만나긴 했네? 오빠랑 저랑 단골술집이 같았던 거 있죠?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근처에 유명한 바가 있거든요. 퇴근길에 항상 들러서 무알콜칵테일을 즐겨 마셨는데...”

 

 “너 술집 다니는 앤 거 눈치 못 챌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신분을 숨기고 싶었으면 좀 더 그럴 듯하게 입고 왔었어야지. 몸뚱이 가려줄 옷 정도 살 돈은 있잖아? 내가 준 돈이 부족하면 말을 하지 그랬어. 날 너무 생각해서 장지까지 따라오는 것도 부족해, 서울 갈 때 운전까지 해주겠다는 사람의 복장은 아니잖아. 엿 먹이는 것도 아니고. 이 따위로 천박하게 입은 널, 달고 온 날 사람들이 뭐로 볼까? 호빠 선수? 아니면 나가요 언니를 애인으로 둔 졸부? 그것도 아님 나가요 언니에게 순정을 바친 바보? 나한테 돈 뜯어내는 게 특기인 애가 왜 이렇게 좋은 기회를 날려버렸니. 옷 좀 사게 돈 좀 달라고 하지 그랬어.”

 

  표독스런 말과 달리 진호얼굴은 여전히 무료하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마나 미간에 주름도 안 지고, 눈이 치켜 올라가지도 않았으며 얼굴이 벌게지지도 않았다. 목소리조차 커지기는커녕 일정하다.

 

  얼굴 어디에도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상심이나 슬픔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삶 자체에 흥미를 잃은 사람. 언제 죽어도 놀랄 것 없는 상태의 사람. 그 자체로만 보인다.

 

  위태롭고 불안하다.

 

  사실 민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할 생각을 안 할 정도로 어수룩하고 순진하다. 보고 들은 대로 믿고, 자신의 사람들에겐 뭐든 다 준다. 그래서 항상 민희 곁엔 하이에나처럼 비열한 인간들만 꼬였다.

 

  그런 민희가 유일하게 거짓말을 하는 대상이 진호다. 진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민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민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도 숨김이 없었다. 술집 다니는, 천박한, 여우같은, 몸 파는, 싸구려 등등 앞에 뭐가 붙든 항상 ‘년’으로 끝나는 자신을 지칭하는 온갖 말에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상처받은 적도 없다.

 

  다 사실이니깐.

 

  그러나 민희가 일하는 회원제 클럽에 진호가 찾아온 뒤, 민희는 거짓말을 하는 횟수가 잦아졌고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졌다.

 

  연회비가 1억인 만큼 클럽 회원들은 저마다 스스로를 대한민국 상위1%라 자신하며 온갖 거드름을 피웠다.

 

  겉만 명품인 그들은 여종업원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성욕해소용 장난감으로 생각하며 온갖 더러운 짓을 저질러도 돈이면 다 된다고 믿는 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항상 혼자 와서 위스키 한 잔만 마시고 갈 뿐, 여종업원이 옆에 앉아있어도 추근대거나 몸을 함부로 만지는 일이 없는 진호는 단연 돋보이는 손님이었다. 그래서 진호가 오는 날이면, 종업원들끼리 서로 그 방에 들어가겠다고 가위바위보도 모자라 웃돈까지 내며 난리를 피웠었다.

 

  그런 진호가 처음으로 도우미를 콕 집은 날이 있었다. 진호는 마담에게 민희가 매달 클럽에 벌어다주는 돈이 얼마냐고 물었다. 그날 이후, 민희는 더 이상 억지로 웃거나 술을 마시거나 마음에도 없는 낯선 사람들에게 몸을 내주지 않아도 되었다.

 

  부모조차 버린 자신을 진호가 구해준 것이다.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이.

 

  열여덟 살 때 아빠 손에 이끌려 유흥가에 팔린 뒤, 10년 만에 되찾은 자유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을 느낀 그날, 민희는 결심했다. 진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그리고 가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이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그런데 진호가 오늘따라 이상하다. 민희가 아는 진호가 아니다. 진호는 클럽에서 선비로 불릴 만큼 얌전하고 감정표현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다. 진호를 안 지 1년이 다 되도록 민희는 진호가 화내고 짜증내고 남을 무시하는 행동을 본 적이 없다. 물론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에 화나 짜증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진호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무시하고 대놓고 면박을 주는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클럽을 찾는 다른 회원과 다를 바 없어 보일 정도다. 진호는 클럽에 있는 모든 여종업원들을 인격체로 대우했고, 민희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오빠도 참. 내가 언제 검정색 옷 입는 것 봤어? 오빠 위해서 특별하게 신경 써서 입고 온 것도 몰라주고. 남자들이 이래요.”

 

  진호가 무슨 말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밝음을 유지하는 민희의 모습에 병진은 점점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데 반해 수현은 왠지 안쓰럽기만 하다.

 

  “여자친구를 너무 함부로 대하는 거 아냐? 너 힘들까봐 옆에 같이 있어주겠다는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은 못할망정 이건 아니지.”

 

  “여자친구? 누가? 얘가?”

 

  망부석처럼 움직임 없이 앉아있던 진호가 처음으로 몸을 돌려 수현을 바라본다.

 

  화가 난 얼굴로.

 

  그리고 시종일관 일정한 데시벨을 유지하던 목소리가 크게 요동친다. 민희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지고 불안한 기색이 엄습한다.

 

  “예나 지금이나 눈치 없는 건 여전하네.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야 하는 걸 참 못했는데... 똑같네? 사람이 어떻게 발전이 없냐? 그러니깐 네가 지금까지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거야. 꼬라지게 이게 뭐야. 좀 잘 살 순 없었어?”

 

  얼굴에 광이 나는 진호와 달리 수현의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그늘져있다. 머리는 집에서 부엌가위로 잘라 삐뚤빼뚤하고 손톱 끝은 뭉개져있거나 깨져있다. 양복도 유행지난 디자인이어서 몸에 과할 정도로 딱 맞는다.

 

  “너야말로 주변 사람 신경 안 쓰고, 너만 알고, 사람 무시하는 거 여전하네. 구질구질? 왜? 너처럼 천박하게 명품으로 도배하고 안 와서 불만이야? 11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 너야말로 주제넘었어.”

 

  “이 새끼가!”

 

  진호가 순식간에 수현의 멱살을 잡아채 수현을 바닥에 내팽개친다. 진호가 구석에 처박힌 수현을 깔고 앉아 수현의 얼굴을 사정없이 가격하는 사이, 수현이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진호의 몸통을 잡아채 주먹을 휘두른다.

 

  병진과 민희가 달려들어 둘 사이를 떼어놔도 금세 다시 붙어 주먹이 오가는 두 사람 위로 태식의 영정사진이 툭 떨어지고, 유리가 산산조각난다.

 

  “야 이 새끼들아 떨어지지 못해!!!”

 

  병진의 불호령에 진호와 수현이 그제야 서로의 멱살을 확 놓아버리고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금세 구급상자를 가져온 민희가 입안이 터졌는지 피범벅인 된 진호의 얼굴을 소독약에 적신 거즈로 닦아낸다. 맞기는 수현이 더 많이 맞았는데, 진호와 달리 너무 멀쩡하다.

 

  “한심한 것들. 오랜만에 만나서 이게 할 짓이야? 특히 양진호! 넌 아들이란 놈이 아빠 영정사진 앞에서 이러고 싶어? 11년 만에 찾아와서 아빠한테 부끄럽지도 않아? 태식이가 살아있을 때 그렇게 연락해도 받지 않던 놈이 지 아빠 죽어서야 찾아와서 한다는 짓이 아빠 영정사진 부셔먹고 친구 놈이랑 피 터져가며 치고받고 아주 잘 한다. 잘 해. 양태식! 이래도 내가 네 싸가지 없는 아들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냐? 죽어서라도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너 대신 말해줘야 하냐고. 양태식! 말 좀 해봐. 왜 웃고만 있는데?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이 여기 와 있잖아. 진호 안 보여? 뭔 말 좀 해봐 이 새끼야. 이제라도 진호가 왔잖아. 그런데 왜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어.”

 

  깨진 액자에서 유리조각을 거둬내고 태식의 사진을 꺼내는 병진이 참고 참았던 울분을 터뜨린다.

 

  집도 절도 없이 떠돌이 신세였던 병진을 태식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양브로의 일원으로 받아주었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겐 자신의 오래된 벗이라고 소개하며 불편한 질문이나 상황들로부터 병진을 지켜주었다. 태식의 배려덕분에 병진은 별 걱정 없이 장발의 백투덜로 지금까지 잘 살 수 있었다.

 

  게다가 술만 마시면 병진에게 “나 죽으면, 양브로는 네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태식은 정말 그 약속을 지켰다.

 

  빈소가 차려진 첫날, 첫 조문객으로 온 태식의 변호사가 ‘양태식은 친구 이병진에게 양브로와 관련된 건물, 물품, 자산 등 일체의 모든 것을 양도한다.’는 내용이 담긴 유언장과 관련 문서를 병진에게 건네주고 갔다.

 

  “병진형님 죄송해요...”

 

  태식의 사진을 품에 안고 서럽게 우는 병진을 수현이 살갑게 쓰다듬으며 달래보지만, 병진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쉽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야. 오라구.”

 

  와서 죄송하다는 시늉이라도 하라는 수현의 신호를 본척만척 하는 진호의 얼굴로 수현의 양말이 날아든다.

 

  “죽을래?”

 

  민희가 괜히 오기를 부리는 진호의 손목을 움켜잡아 병진 쪽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진호의 손을 병진의 등에 올려놓고 와이퍼마냥 좌우로 움직인다.

 

  “죄송합니다.”

 

  얼른 사과하라는 수현과 민희의 성화에 진호의 입이 무겁게 떨어지고, 일부러 눈물을 쥐어짜내며 안 들린다는 병진의 억지에 진호가 세 번 더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상황이 종료된다.

 

  “이제 둘이 포옹해. 태식이 앞에서 둘이 이제 안 싸우고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뜻으로 포옹해. 얼른.”

 

  “이제 싸울 일 없어요.”

 

  “얼른 해라. 남자 새끼들이 시원하게 포옹하고 감정 풀면 되지. 괜히 뒤끝 길게 질질 끌지 말고.”

 

  썩은 얼굴로 멀찍이 도망가 앉아있는 진호를 병진이 질질 끌고 와 수현 앞에 앉힌다. 혐오동물을 바라보듯 서로를 마주보고 앉은 진호와 수현의 얼굴이 썩 유쾌하지 않은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민희는 이유 없이 불안하기만 하다.

 

  “하나, 둘, 셋! 안아!”

 

  병진의 손아귀 힘에 진호와 수현의 몸통이 딱 붙는다.

 

  “두 손으로 서로를 감싼다! 실시!”

 

  병진의 불호령에 진호와 수현이 마지못해 손을 들어 서로의 등을 감싸 안는다. 막대기 같이 뻣뻣한 두 사람의 팔이 서로의 몸에 닿지 않고 허공을 헤매는데...

 

  그때, 진호의 체취가 수현의 콧속을 지나 수현의 전두엽 구석에 박혀있던 11년 전의 잔향을 불러낸다.

 

  수현의 손등을 스치고 간 진호의 하와이안 셔츠자락이 남기고 간 그 냄새. 달콤한 과일 향이 깊이 밴 화한 남자스킨 냄새. 진호냄새.

 

  그동안 의식적으로 회피해온 11년 전 진호와의 기억이 바로 눈앞에 있는 진호 위로 오소소 떨어진다.

 

  “너 진짜 뭐야.”

 

  수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다. 애써 봉인시켜놨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나 또 다시 수현을 괴롭힌다. 낯설기만 했던 진호가 수현은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 아무것도 안 했다?”

 

  갑작스런 장르변화에 진호는 당황스럽기만 한데, 수현이 진호의 팔을 잡아당겨 진호를 강하게 끌어안는다.

 

  가슴을 맞댄 두 사람 사이로 수현의 거센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오가고, 이내 진호의 거칠어진 심장박동까지 더해진다.

 

  “왜 이제야 온 거야.”

 

  “미안.”

 

  두 사람 사이로, 두 사람만이 들리는 크기로, 대화가 오간다.

 

  진호의 손바닥이 수현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수현의 주먹이 진호의 등에 허무하게 박힌다.

 

  그렇게 두 사람의 11년 공백이 메워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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