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는 계약에 관해 대수롭지 않게 내뱉었다. 하지만 내게 ‘계약’이란 단어는 꽤나 의미가 컸다.
“너랑 계약을 해서 붉은 여왕을 물리치자고?”
“그려.”
“내가 왜?”
순간 녀석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제 귀를 쓱 어루만지고는 다시 물었다.
“뭐라 했제?”
“붉은 여왕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다 떠나서. 듣기만 해도 귀찮은 짓거리를 내가 왜 해야 하는데? 그것도 너랑 같이.”
“고, 고것은 바로 정의 때문이제, 정의!”
이내 검정 토끼는 뭉툭한 제 앞발을 하늘 위로 들어올렸다.
“세상이 위험에 빠졌을 때는, 항상 그 세상을 지키기 위한 영웅이 나타나기 마련이여. 하지만 그 영웅이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지.”
“…….”
“자고로, 영웅의 조건이란 무엇이냐.”
녀석은 하늘로 들어 올렸던 앞발을 내려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나보다 강해보이는 것 앞에서도 맞서 싸울 줄 아는 용기! 남을 진정으로 위할 줄 아는 사랑!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포기하지 않는 희망!”
토끼는 부드러운 제 손으로 내 손을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 모든 것을 갖춘, 선택받은 용사란 말이여.”
“선택받은 용사?”
“그려, 그려!”
토끼가 두 눈을 빛내며 아까 전 제가 꺼내들었던 양피지를 내게 스윽 내밀었다.
“자, 어서 나와 계약을 맺자. 아까 전에 썼던 힘 있제? 나랑 계약하면, 그거 네 맘대로 쓸 수 있어야.”
“…그래. 좋은 마법 지팡이였지.”
“그것뿐이겠냐? 내가 다른 가디언 중에서도 복지가 탑이여. 생존에 필요한 물품들 무한정 제공하고, 변신할 때마다 예쁜 의상들 아낌없이 배포해 줄겨!”
“…….”
토끼는 내 침묵을 긍정이라 여겼는지 신이 나서 귀를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녀석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고작 정의감 때문에 너랑 계약을 맺고, 위험한 일에 뛰어들라고?”
토끼가 뭉툭한 두 손으로 들고 있던 양피지를 빼앗아 던져버렸다. 토끼의 푸른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까 네 도움으로 살아남을 수 있던 건 고마워. 하지만 난,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함부로 뛰어들 만큼 정의감 넘치는 성격이 아니야.”
“하, 하지만 방금 네가 쟤를 구해줬잖여…! 남을 구한다는 건 정의로운 용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여….”
“난 쟬 구한 적 없어.”
나는 쓰러져 있는 엘리네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의 모습으로 누워있던 엘리네는 어느덧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마도 크리처에게 지배당하면서 순식간에 유지력도 잃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카락에도 불구하고 청순한 모습. 은은한 빛을 내뿜는 그의 모습은 가히 다섯 수호자의 수장이라고 할 만큼 성스러웠다.
“내가 얠 살렸던 건,”
이내 그 성수 위에 먹물 한 방울 같은 내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입은 순백색 사제복. 살짝 찢어진 그녀의 가슴께로 손을 밀어 넣었다.
“뭐, 뭐하는겨?!”
토끼의 볼에 새빨간 홍조가 떠올랐다. 녀석의 앞발이 빠른 속도로 구르기 시작했다.
“으…음…….”
쓰러진 엘리네의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신음에도 아랑곳 않고 손을 계속 움직였다. 성전에서 성수물만 먹은 것 치고는 꽤나 단단한 가슴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야! 이거 전체 이용가란 말여!! 막 나가자는 거여?!”
토끼의 성화에 그제야 손놀림을 멈추었다. 이윽고 엘리네의 사제복에서 손을 빼내었다. 내 손에는 그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들려있었다.
“그, 그게 뭐여?”
“이걸 받으려고 살린 거야.”
“……너 도적이여? 괴도?”
“완전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그 목걸이는 단순한 목걸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에니타스의 성전에 있는 수호수의 가지로 만들어졌으며 수호수의 나뭇잎이 장식처럼 매달려 있었다.
“뭐여, 비싼 거여?”
“비싸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나는 그 목걸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토끼는 눈살을 찌푸린 채로 ‘저 도둑X’ 표정을 지었다.
무, 물론 나도 이걸 가지려고 엘리네를 살린 건 전혀 아니었다. 사실 엘리네에게 이런 목걸이가 있다는 건 지금에서야 막 떠오른 것이었다.
<수호수의 치유력이 담긴 목걸이>
오랜 세월 동안 에니타스 안에 뿌리를 내린 수호수. 그것의 엄청난 치유력을 담은 목걸이였다.
‘게임에서는 분명 죽음을 직전에 둔 사람을 살릴 정도의 치유력을 가졌었지.’
물론 진짜 수호수는 아니기 때문에 한계는 있다. 치유력을 쓸수록 목걸이에 달린 나뭇잎이 말라가기 시작하고, 결국 그 나뭇잎이 떨어지게 되면 목걸이는 무용지물.
‘물론 좋은 목걸이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탐을 내는 건 아니야. 난 다만…’
신경 쓰지 않는 척, 곁눈질로 토깽이의 눈치를 살폈다. 토깽이는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희고 긴 수염을 떨고 있는 중이었다.
‘저 녀석이 날 정의로운 용사로 생각하게 만들고 싶진 않단 말이야!’
정의로운 사람. 착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 죽어도 싫다. 그건 내 입장에서 ‘너 앞으로 호구예약.’과 같은 말이었기 때문에.
‘딱 봐도 붉은 여왕인지 뭔지는 엄청나게 위험한 최종보스겠지! 더구나 에니타스가 그 여왕의 저주를 받아 이렇게 됐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정도로 위험한 블러드 필드. 게임을 만들 때는 단순히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만 설정했지만, 저 토끼가 말하길 ‘붉은 여왕의 저주를 받아’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신이랑 동급이란 말이잖아.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이겨…….’
그래, 그래. 내 새끼들을 위한 일은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지는 못한다.
“…….”
“토깽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정의감에 얘를 살린 게 아니야. 난 그냥 평범한 도적, 아, 아니 사람이라고. 너 계약 맺을 사람 잘못 봤어. 더 정의롭고 용감한 사람을 찾아봐.”
“그렇단 말여…?”
“그래. 난 그냥 이걸 가지고 싶어서 얠 살린 거란 말이야.”
목걸이를 들고 찰랑 찰랑, 흔드는 모습은 아마 누가 봐도 도적 비주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의니 뭐니, 되지도 않는 이야기는 나한테 안 통한다는 말인…,”
“너야말로 내가 찾던 사람이였구먼.”
순간, 토깽이가 몽실몽실한 두 손으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우리 둘 사이로 꽃잎이 살랑였다. 어디선가 ‘찾았다, 내 사람-’ BGM이 흘러나오는 듯 했다.
“아무래도 넌 나랑 계약을 해야 쓰겄어.”
뭐지? 저 토깽이. 정의, 정의 강조하더니 지금껏 내 불의를 보지 못한 건가?
“내가 막 목걸이도 뺏고, 어? 내가 막, 막, 어? 쓰러진 사람 품에 손도 집어넣고, 어? 자칫하다, 어? 사람도 가지게 생겼는데, 너 내가 얼마나 불의와 가까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그건 불의가 아니라 솔직한 것이제. 나도 이해혀.”
토깽이는 귀를 쫑긋거리며 두 눈을 감고 누워있는 엘리네를 돌아보았다.
“애가 예쁘잖여. 취향은 존중헌다.”
저런 편견없는 토끼 같으니.
“것보다 난 네 마인드가 맘에 든다.”
토깽이는 양피지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더니 이내 내게 뭉툭한 손을 내밀었다.
“정의감 때문에만 네게 계약 제안을 한 게 아녀. 나도 에니타스한테 갚아야 할 게 있어서 가디언으로 붙잡혀 있는 거지.”
토깽이의 수염이 또 다시 부들부들 떨렸다. 꽤나 험한 우여곡절을 겪은 듯 보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열불 터지니 그냥 넘어가고. 어찌 됐든, 여차저차 하여! 물론 여기서 여차저차는 녹차 홍차 같은 것이 아녀.”
토끼는 우아한 외모와는 달리 구수한 아재개그를 내뱉고는 혼자 터졌다. 듣는 사람 복장 터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었다.
“내가 다달이 에니타스한테 수납해야만 하는 게 있어.”
“뭔데.”
“신의 조각.”
아,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났다. 저택에서 탈출하는 미션에 성공했다며 내게 신의 조각 100개를 받았다는 메시지 창이 떠올랐었지.
「놀자, 헤르미안.」
「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거야.」
「흑곰. 약속. 지킨다. 헤르미안. 구한다.」
“우욱…….”
순간 저택에서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입술을 깨물고, 깨물어도 잊히지 않는 마지막 잔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건 이미 지난 일이야. 이미 지난 일.’
가까스로 머릿속을 진정시키며, 아까 전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신의 조각을 토깽이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걸 말하는 거야?”
그러자 흥분한 토깽이가 두 발을 동동 구르더니 제 앞발로 낚아채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더 멀리 손을 뻗었다.
“그렇게 쉽게는 못 주지.”
“우어어어!”
토끼는 맹수처럼 포효했으나 그래봤자 토깽이였다.
“아까 네가 그랬지. 너랑 계약 맺으면 이것저것 다 해준다고.”
“그려! 뭔들 다 해 줄 수 있어! 말만 혀봐!”
게임 상에서는 빛의 방울이란 걸 만든 적이 없어서 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저렇게 애태우는 것을 보니 꽤나 중요한 아이템인 것이 분명했다.
“……혹시 내가 너랑 계약을 맺는다면.”
토깽이가 귀를 쫑긋 세운 채 나를 바라본다. 옆에 가만히 있던 토끼 같은 엘리네도 귀를 쫑긋 세운 채 다음 말을 기다린다.
정작 내 입술은 달싹거리기만 할 뿐, 한참이나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어지는 토깽이의 성화에 간신히 내뱉은 질문은….
“죽은 사람을 되살려줄 수도 있니?”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이었다.
“죽은 사람? 아따, 그런 위험한 짓을 왜 하려고 한다냐?!”
“위험한 짓?! 일단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거지?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있다는 거지?!”
순간 말실수를 했다는 듯 토깽이의 얼굴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뭐, 불가능한 건 아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해야.”
“재료가 필요한 거야? 아니면 제물 같은 거?”
“워메? 재물이라니. 야가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구먼? 필요한 건 제물이 아니라…!”
토깽이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얌전히 누워있던 엘리네가 별안간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큰일 났다. 쟈, 일어나나 보다. 변신한 모습을 들켜서는 안 되는디!”
“뭐?! 왜 안 되는데?!”
“여긴 블러드 필드여. 사방이 적이란 말이제. 저 녀석들도 붉은 여왕의 수하일지도 모르니 자나깨나 신변보호를 해야 한단 말여!”
그렇게 외치더니 누가 토끼 아니랄까봐 토끼 굴 파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제. 이게 아니자녀!”
이내 토깽이는 펜던트를 꾹 쥐더니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토깽이의 몸이 보라색 빛으로 변하더니 펜던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야…! 야, 너 혼자 사라지면 날더러 어쩌라고…!”
망연자실 펜던트만 붙잡고 있던 때. 나를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저기.”
저 부드러운 바닐라 라떼 같은 톤에 레모네이드 같은 상큼함을 가진 목소리.
“저기요…….”
여자 주인공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네?”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왜 저희가 지하신전으로 떨어졌는지… 아니, 아니지. 초면부터 실례를….”
정정해야겠다. 엘리네는 바닐라 라떼 말고. 레모네이드 말고. 우유. 그것도 딸기 우유.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기억이 흐릿해서 말입니다.”
찢겨진 사제복을 입은 엘리네는 입술을 살짝 깨문다. 이윽고 난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놀랍게도 그 행동 하나 하나가 처연하게 느껴져 당황스럽다. 같은 여자에게서 이런 분위기를 느끼다니.
“……누구신지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엘리네의 투명한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친다. 토끼 녀석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망할 놈의 동글뱅이와 레이스 장갑. 화려한 보랏빛 드레스.
‘이건 아무래도 피해가기 힘든 패션이군.’
판단을 내린 나는 결국 최대한 맑고 밝은 목소리를 짜내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음. 당신을 지키기 위해 온, 요정?”
“…….”
토끼굴이 있다면 안에 숨은 토끼 다 끄집어내고 내가 숨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