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21화
“다음 목적지는 어디까지이십니까?”
브륜힐 대주교가 걱정스레 물었다. 달리아와 브리택은 아스포네 주교좌성당의 공터에서 배웅받는 중이었다.
“안네뇰 영지에요. 아마 그곳에는…만약 그곳이 괜찮다면, 비브리오 고스페로 대주교님이 계신 걸로 기억해요.”
“머스그레이브 영지에 소식이 닿지 않았군요. 그분의 아들인 비브레 고스페로 대주교가 두 달 전에 직위를 이으셨습니다.”
달리아가 눈을 깜박였다. 그럴 만 했다. 묘지기 가문과 교회는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영혼의 영면에 대한 견해부터가 조금씩 달랐으니까.
“그게 그렇게 되었군요….”
“그보다 안네뇰까지는 상당히 멀 텐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고민해보건대, 이미 왕성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까지 가버렸다는 것을 이미 알아챈 지금은 굳이 급하게 왕성까지 갈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최대한 많은 중간 영지들을 들러서 결속을 도모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안네뇰은 주변 영지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으니까요. 어…혹시 이것도 아닌가요?”
브륜힐 대주교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건 아직도 건재합니다. 안네뇰 영지는 분지의 중앙에 위치해있으니까요. 그래도 아마 먼 길을 아무런 중간역 없이 가시는 건 힘겨우실거고, 게다가 위험하실겝니다. 중간중간 다른 영지들이 보이면 쉬다 가시지요. 걱정됩니다.”
달리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주교님의 걱정 감사합니다. 명심하도록 할게요.”
브륜힐 대주교는 그래도 무언가 아직 더 당부할 게 있는지 입을 열었다.
“고스페로 가문은 대대로 교회에 종사해서인지 묘지기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곤 하지만, 이번에 취임한 비브레 고스페로 대주교는 젊은 만큼 그런 편견이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묘지기 가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겠지요.”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이 늙은이는 이번에야말로 무언가의 기회가 될 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머나먼 옛 시대의 선왕께서부터 소망해오던….”
그게 무엇인지 달리아가 모를 리 없었다. 그것은 지금의 시대에 와서는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오던 소망이었다.
“모든 망자들의 영면….”
대주교가 그녀의 은촛대지팡이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세월밖에 겪은 게 없는 이 노망난 늙은이의 안목이지만, 제법 틀린 적이 없다 자부하고 있습니다.”
달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에게…그런 대단한 자질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머스그레이브의 묘지기로서 할 수 있는 만큼 깊고 어두운 곳까지 불을 밝히도록 노력할게요.”
“그걸로 족합니다. 몸 조심히 갔다가 반드시 돌아오세요.”
마지막 인사가 그렇게 끝나고, 브리택은 천천히 성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브리택, 안네뇰까지 한 번에 갈 수 있겠어요?”
“난 갈 수 있겠는데, 네가 못 버틸거야.”
해가 쨍하니 내리쬐고 있었다. 바람은 거친데다 말라붙어있었다. 굴러다니는 것은 초식동물의 뼈나 회전초 뿐이었고, 곳곳에는 버려진 영지들의 잔해와 폐허만이 남아있는 곳. 그것이 이 땅덩어리를 다스리는 얀데스 왕국의 황무지였다.
“브리택, 서쪽 끝의 검은 가시나무 숲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냥 해본 소리에요.”
브리택은 실없이 웃었다. 달리아도 따라 웃었다. 이미 둘은 그셀바 영지의 새하얀 빛을 벗어나선, 더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달리아, 가는 길에 마을이나 영지가 있어?”
“어…있긴 한데….”
달리아가 지도를 펴서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있긴 했다.
“지금도 살아있는 마을일지는 조금 불투명해요. 대주교급 영지면 거의 다 살아있을텐데…. 안네뇰까지 그셀바처럼 커다란 대주교님 상주영지가 있진 않아요.”
“그러면?”
달리아는 지도에 있는 중간 크기의 십자가와 작은 크기의 십자가를 세어 보았다.
“주교님께서 상주하시는 영지가 세 곳, 사제님께서 상주하시는 마을이 일곱 곳이에요.”
“얼마나…살아있을까?”
“지도가…만들어진지 4년이 되었으니까…아마도 영지 한 곳 빼곤 전부….”
잠시 흐른 어색한 침묵을 브리택이 먼저 깨고 말했다.
“그 한 곳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겠네.”
“그럴…거에요.”
“넌, 도와줄거지?”
달리아는 싱긋 웃으며 브리택의 귀를 매만졌다. 조금 몸이 흔들렸고, 달리아는 그게 좋았다.
“브리택은 나를 너무 잘 알아요.”
“…달리아, 귀.”
킥킥거리며 손을 치워주었다.
“당연히 도와야지요. 전 그래도 묘지기인데.”
브리택은 달리아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언가 고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달리아는 그가 하는 고민이 대단히 궁금했지만, 그가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그리고 달리아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아서, 브리택은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달리아.”
“네?”
브리택이 침을 꿀꺽 넘겼다. 뜸을 많이 들이는 걸 보면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세상보다 네가 먼저야.”
잠시 달리아가 얼어붙었다. 곧이어 킥킥대며 웃었다. 결국에는 브리택의 목을 끌어안았다.
“브리택, 내가 걱정돼서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농담 아니야.”
그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진지했다.
“나한테…만약에 이 세상과 너를 두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나는 널 선택할거야.”
“…내가 브리택한테 그 정도에요?”
그가 그 커다란 머리를 끄덕였다. 달리아는 그의 커다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럴 땐 세상을 선택해요.”
“…왜? 싫은데. 절대 안 그럴 거야.”
그는 마치 삐진 남자아이처럼 굴었다. 고집이 세기도 했다.
“생각해봐요. 이 세상에 오로지 나만 남는다면, 나는 브리택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는걸. 하지만 세상을 선택하면….”
“난 너 없이 혼자 못 살아.”
“좀 들어봐요, 브리택.”
달리아가 다시 그의 귀를 잡았고, 이번엔 살짝 비틀었다. 그제서야 브리택이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궁시렁대긴 했지만.
“세상에는 나와 브리택도 포함되어 있잖아요. 안 그래요?”
브리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리아가 킬킬대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런 제안을 하는게 신이든 악마든 그런 말속임에 넘어가지 말라는 거에요. 알았죠?”
“…그래.”
달리아는 그제서야 브리택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걸었을까. 달리아와 브리택은 가느다란 빛의 기둥을 보았다. 거리를 생각해보면, 어쩜 저렇게 가느다랗지 싶을 정도의 빛이었다. 사실은 말도 되지 않았다. 달리아는 급히 지도를 꺼내서 위치를 확인해보았고, 그게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제급 주관의 마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브리택.”
“응?”
“저 빛, 아직 살아있는 사제급 마을의 결계인 것 같은데…들렀다 갈까요?”
문제는 저게 마을이라고 쳐도 가느다란 빛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뭔가 불길한데….”
브리택은 살짝 방향을 비켰고, 달리아는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
“일단 주변을 돌아보자.”
달리아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바로 마을에 들어가기보단 주변에서 지켜보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그의 제안은 탁월하게 맞아떨어져서, 달리아는 그 마을의 결계가 기형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브리택, 저 결계….”
“그래, 교회만 보호하고 있어.”
빛의 기둥은 딱 교회와 그 울타리만을 보호하고 있었고, 심지어 주변에는 새카맣게 뒤틀린 악령들이 다른 건물들의 그림자 사이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달리아, 위험하지 않을까?”
달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기 악령들이…보이는 것만 일곱 명이나 있긴 하지만 다들 악령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보여요. 봐요, 까맣게 말라붙고 뒤틀리긴 했지만 그래도 인간의 모습과 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잖아요. 뭔가…뭔가의 사정이 있을거에요.”
안 그래도 몇이 이곳을 흘끗 쳐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달리아가 쥐고 있는 은촛대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온 따스한 불빛 때문일 것이다.
“대충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
“짐작가는 바가 있긴 해요. 해결하긴 한없이 어렵겠지만….”
달리아가 바라는 바에 따라, 브리택은 그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달리아는 조금 더 지팡이를 세게 쥐었고, 새하얀 촛불은 더 따스하게 빛을 뿌렸다. 악령들이 모여들었지만 달리아를 공격하진 않았다.
‘확실히…이상해.’
오히려 달리아를 맞이하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달리아와 브리택이 교회의 빛 앞에 설 때까지 오히려 길을 터 주었고,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조그마한 밭을 갈던 사람들이 오히려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영면의 짐을 진 여든 한 번째 의무자, 묘지기 달리아 머스그레이브입니다.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한 명의 농부가 교회 안으로 급하게 달려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 두 명의 사람이 나왔다. 한 명은 소년이었고, 한 명은 장년이었다. 그리고 둘 중 사제복을 입고 있는 이는 소년이었다.
문제는, 장년의 손에 쥐인 칼이 사제 소년의 목을 겨눴다는 것이었다.
“대체…이게 무슨 상황이죠?”
사제 소년은 말을 하지 못했다. 대신 그 장년이 입을 열었다.
“너, 너희들은 아무것도 몰라! 곧, 곧 악귀가…악귀가 다시 올 거다…결계를 조그맣고 튼튼하게 만들어야 그나마 한줌의 사람이라도 살 수 있어!”
결계를 거는 사람의 실력이 동일할 경우 작은 것이 더 단단하다는 건 만고의 진리였다. 브리택도 이제서야 대충 사태를 파악한 것 같았다.
“달리아, 이거 설마….”
“일이…생각보다 더 꼬였어요.”
머스그레이브 영지를 떠나온 뒤로 만만한 날이 하나도 없었다. 달리아는 다 때려치우고 폭신한 침대에서 브리택에게 안겨 한 이틀쯤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 얼굴을 붉혔다.
‘…언제부터 내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됐담.’
중년 남자는 여전히 사제 소년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묘지기? 묘지기 양반이라고? 그, 그럼 악귀, 악귀놈을 어떻게 좀 처죽여봐! 이 모든 사단이 그 악귀, 악귀놈 때문이라고!!”
“자세히…설명해주세요. 일단 저희는 들어가도 되겠지요?”
달리아는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본데없는 하대도 그렇고, 사제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드, 들어와라.”
브리택은 발걸음을 옮겼다. 달리아의 등 뒤에서 악령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망자들이 따라들어오려다 빛의 기둥에 가로막혔다. 그들은 애처롭게, 정말 한없이 애처롭게 결계를 두드리고 긁어대며 구슬피 울었다.
“뭐, 뭐해! 다들 농사 안 짓고! 일 해, 일!”
장년이 고함을 치자 사람들이 다시 바쁘게 괭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기껏해야 열 명 정도였다.
“그리고 거기 묘지기 양반은—.”
“—죽고 싶지 않다면 존대해라.”
참다 못한 브리택이 먼저 터졌다. 그 시퍼런 눈빛이 줄기줄기 안광을 내뿜고, 새하얀 송곳니가 칼날처럼 드러났다. 칼을 든 그 장년은 오금이 저렸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은 대체 누구길래 사제의 존엄한 몸에 칼을 들이밀고 있지요?”
달리아가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 그셀바에서 브륜힐 대주교나 다른 성직자들을 영지민들이 대하는 태도를 살펴보자면 그야말로 극진한 수준이었다. 성직자들의 결계가 영지를 수호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 나도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모두가 살 수 있어요!”
눈살이 찌푸려지는 소리였다. 달리아가 재차 물었다.
“난 그 이유를 물었어요. 모두가 살고 죽고를 물고 있는게 아니에요. 당신은 대체 왜 사제의 존엄한 몸에 칼을 들이밀고 있지요?”
사제 소년이 목소리를 내었다. 아마도 묘지기라는 큰 지위를 지닌 사람이 자신을 보호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저는 나얄 테네시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트료넬 여신을 섬기는 작은 종자이지요…. 그리고 제 뒤의 이 인간은 저와 트료넬 여신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는 불신자—.”
“—다, 닥쳐!”
칼날이 좀 더 소년의 새하얀 목덜미 가까이 다가갔다. 결국 소년 사제는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장년 남성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 하하, 하하하, 반갑습니다, 묘지기님. 다름이 아니오라 우리 어린 사제님께서 모두를 몰살할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을 자꾸만 하시려고 해서 결국 제가 팔을 걷어붙이고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이나마 사용하게 되었다, 이말입니다!”
달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곤 짤막하게 주문했다.
“말해 보세요. 무슨 선택을 하시려고 했길래 사제님께서 이런 치욕을 감내하셔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