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달리아, 너 바람 피워?”
브리택은 정말이지 진심으로 상처받은 표정이었고, 달리아는 그를 보면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끊는 목소리라는게 무엇인지 방금 듣고야 만 것이다.
“무슨 소리에요, 브리택. 나도 뭔소린지 모르겠는데.”
하나 다행이라면 묘지기와 묘지기견은 서로의 진실과 거짓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브리택은 눈물이 쏙 빠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행이다….”
“…날 그렇게 못믿어요?”
브리택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넌 아직 날 사랑한다고 안 해 줬잖아.”
“…그럼 내가 다른 사람이랑 사귀어도 바람은 아닌데?”
달리아가 그의 코를 톡톡 두드리며 대꾸했다. 그러자 브리택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늑대개 모습인 그의 귀가 축 쳐지고,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버렸다.
“…그러게.”
축 처진 브리택의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달리아는 피식 웃으며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뭐야, 브리택. 그정도로 지금 나를 포기하는 거에요?”
“포기한다곤 안 했어.”
달리아가 눈을 깜박였다.
“그럼…?”
“공략법을 고민중이야. 아무래도 안되겠어. 경쟁자가 이렇게나 많아서야 원….”
달리아는 참지 못하고 킬킬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목을 냅다 끌어안았다. 그 보드라운 털이 가득한 커다란 뺨에 제 뺨을 부볐다.
“그래도 아직까지 제가 그나마 사귀고 싶은 사람은 브리택 뿐이니까, 안심해요.”
“…하나도 안심 안 되거든.”
달리아는 여전히 웃으며 그의 뒤에 올라탔고, 브리택은 다시 성큼성큼 그셀바 영지의 흰 빛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 줘야 안심할거에요?”
브리택은 잠시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곤 내뱉었다.
“…뭐든 해 줄 거야?”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면요.”
달리아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가만히 그의 커다란 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보드라웠다. 브리택이 움찔 몸을 떨었고, 달리아는 그 바람에 몸이 조금 흔들렸다.
“…!”
급하게 다시 손잡이를 붙잡았다.
“미, 미안해요, 많이 싫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브리택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해가 생긴 모양이었다.
“…너도 내가 네 귀 만지면 움찔거리잖아.”
“아.”
그제서야 달리아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곤 얼굴을 조금 붉혔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좋았구나?”
브리택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달리아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킥킥거렸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다가, 불쑥 내뱉었다.
“밤에 키스해줘.”
“…갑자기요?”
달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브리택은 제법 당당한 목소리였다.
“아까, 네가 해 줄 수 있는 거면 뭐든 해준다며?”
“…그, 그래서 그걸 원한다?”
“그래.”
달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브리택은 아까의 그 기운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선 성큼성큼 내걷고 있었다.
“…알았어요.”
이윽고 그 성큼거리는 발걸음은 경쾌하고 활발한 스텝으로 바뀌었다. 기분이 매우 좋은 모양이었다. 달리아는 피식 웃어버렸고, 브리택은 콧노래를 부르며 발랄한 걸음으로 영지를 향했다.
영지의 정문은 처음 왔을 때처럼 빨리 열렸다. 저 문 뒤에서 낑낑대며 손잡이를 내려 돌리고 있을 사람들의 노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달리아와 브리택은 길 한가운데로 당당하게 들어왔고, 대주교가 열린 문의 바로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은 무사히 마치셨습니까, 묘지기님?”
“저, 저에게 그렇게까지 존칭을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주교님.”
달리아는 슬슬 이제 그의 존칭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아무리 자신이 묘지기고, 묘지기들과 교회는 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는 대주교였다. 얀데스 왕국 전체를 통틀어 스물도 채 안되는. 달리아는 브리택의 위에서 내려왔다.
“아닙니다. 이 늙은이가 가당치도 않은 직함을 달고 있으나, 삼대 묘지기 가문의 가주님에게 말을 놓을 수는 없지요.”
가주님…. 달리아 머스그레이브는 새삼스럽게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 자신의 아버지를 타도해야만 했다.
“…그도 그렇겠네요. 저도 머스그레이브의 주인으로서…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해야 하고요.”
“얀데노르 왕성이 함락당했다면 다엘라 세뇨보르 총대주교님도 서거하신것일지…염려되긴 합니다. 가주님께서는 일단 지금은 그셀바를 떠나실 생각이신 게지요?”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마 이곳보다 더 얀데노르 왕성에 가까운 영지들은 난리가 났을 거에요.
늙은 대주교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야 어딜 길게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늙어버려서 도움이 되지 못하는게 아쉬울 따름이군요…. 제 못난 손자놈은 지하감옥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제가…이 늙은이가…차마 하나 남은 손주놈 목을 치진 못하겠더군요….”
달리아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도 제 아버지의 목을 치러 가야만 했으니까.
“…이해합니다. 어찌 혈육의 정을 그리 쉽게 끊어낼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달리아는 브리택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하루만 더 묵고 가도 될까요? 여독이 풀리기는 커녕 신경쓸 일만 늘어버려서…고단하네요.”
엘리어트 브륜힐 대주교가 팔을 벌리며 대답했다.
“그러믄요, 가주님. 얼마든지 묵고 가셔도 좋습니다. 아스포네 주교좌성당의 귀빈실은 언제나 가주님께 열려있을 겝니다.”
달리아가 허리를 숙였고, 브리택도 가만히 고개를 조금 숙였다. 감사의 의미였다. 대주교는 그들의 인사에 마주 숙이는 것으로 답례했다. 대주교와 달리아가 서로의 길로 갈라지자, 모였던 군중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아, 배고프다. 브리택, 우리 뭐 먹으러 갈래요?”
“생각해보니 너,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구나?”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기 태양이 빨개지면서 서쪽의 산 위를 비추는 걸 보니 벌써 저녁때였다.
“음…근데 브리택이 들어가도 될 만큼 커다란 음식점이 있을까요.”
그게 문제였다. 브리택도 달리아의 말을 듣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달리아가 먼저 해답에 도달했다.
“샌드위치 사서 가면 되죠, 뭐.”
“그럴까?”
오랜만에 먹는 샌드위치였다. 달리아와 브리택은 줄 선 사람들보다 먼저 샌드위치를 살 수 있었고, 해가 지기 직전에 아스포네 주교좌성당의 귀빈실로 돌아왔다.
달리아는 브리택이 뒤돌아본 사이에 먼저 옷을 갈아입었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샌드위치의 종이 포장을 벗겨내선 한 입 베어물었다. 다진 고기와 볶은 양파의 맛이 썩 괜찮았다.
“브리택, 브리택도 얼른 먹어요.”
저 멀리 때 좋게 해가 졌고, 브리택은 달리아의 옆에 앉아선 샌드위치를 잡은 그 작은 손을 붙잡았다.
“…?”
그리곤 달리아가 베어물었던 부분을 덥석 베어먹었다.
“브, 브리택…?”
“같이 먹을래.”
달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이 남자는 방심을 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그래요….”
그래도 그의 미소를 보고 있자면 화가 나질 않았다. 달리아는 그가 먹었던 자리를 다시 베어물면서 가만히 오물거리는 그의 뺨을 매만졌다.
“지금 뭐하는거야?”
달리아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 키스해줄지 생각하고 있어요.”
그는 우물거리던 샌드위치를 꿀꺽 삼켰고, 곧바로 달리아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놀란 달리아의 손가락에서 반쯤 남은 샌드위치가 툭, 굴러떨어졌다.
‘…!’
그가 입술을 거두자, 어깨를 바싹 오므린 달리아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보였다. 몸에 힘이 들어갔는지 바짝 패인 쇄골이 잠옷으로 입는 원피스의 깊게 파인 목깃으로 보였다.
“달리아.”
“…사랑한다고요?”
그가 피식 웃었다. 달리아를 끌어안고 침대 위에 눕혔다.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 귀를 살짝 깨물어 당겼다. 달리아의 작은 몸이 가늘게 떨었다.
“흐, 윽.”
브리택이 그녀의 조그마한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 입술만 겨우 오물거리는 달리아를 끌어안았다. 그 단단한 팔이 제 허리를 꽉 감아 끌어당기고, 등에 그의 탄탄한 가슴이 와닿았다. 새하얀 목에 그의 팔이 마치 베개처럼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의 몸에서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머스캣같은 달달한 향이 났다. 기분 탓일지도 몰랐다.
“…오늘도 이러고 잘 거죠?”
“싫어?”
달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몸을 반대로 틀어서 그를 마주보고, 그의 품을 파고들어 안겼다.
“…좋아요.”
-
⌜싫어요!⌟
어린 시절의 자신이 외치고 있었다. 저 멀리는 황금색 머리의 소년이 검은 영혼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점점 더, 검은 왕좌터의 깊은 곳으로.
⌜달리아! 그만둬라!⌟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어린 자신은 이미 불러온 검은 영혼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기사들은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고, 달리아의 비명은 다시 한 번 그 검은 영혼들을 불러냈다.
모두가, 모두가 검은 왕좌터로 끌려들어갔다. 칼을 들고 있었던 모든 이가.
⌜아, 아, 아버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 살아있는 이라고는 달리아 머스그레이브와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가 전부였다. 아버지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집사!⌟
오코넬 로빈슨은 단숨에 달려나왔다.
⌜달리아를…지하 감옥의 빈 곳으로 데려가게.⌟
어린 달리아의 옆에 있던, 조그마한 늑대개가 아브라함을 보고 컹컹 짖기 시작했다. 짖는 것 뿐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아버지에게 달려들었고, 제 아버지는 그런 녀석을 걷어차서 저 멀리로 날려보냈다.
-
이번에는 브리택이 자신을 부서져라 껴안고 있었다. 달리아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그의 품에 안겨 떨었다. 꿈에서는 깼지만, 몸이 떨리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브리택…이거 꿈이 아닌…것 같아요….”
브리택은 말없이 달리아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에 달리아는 점점 더, 점점 더 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괜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언가 굉장히 두려운 것이, 마주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비밀이 제 사라진 기억 속에 있을 것이다.
이게…끝이 아니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달리아, 괜찮아.”
“뭐가, 뭐가 괜찮아요. 이게, 이게 꿈이 아니라 사실이면, 나는, 나는….”
“꿈이야, 달리아. 괜찮아. 그냥 꿈이야.”
브리택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왁스에 인장을 찍고 뽑아내면 인장의 자국이 남듯이, 영혼에서 기억이 뽑혀나가도 그 자국은 남는다. 달리아는 그 단편적인 기억의 자국을 꿈으로 꾸고 있었다.
‘단순한 꿈이 아니라…사실의 파편이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줄 수 없었다. 달리아는 브리택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브리택은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줄 수 없었다.
“꿈이야, 달리아. 알았지? 걱정 마. 내가 네 곁에 있잖아.”
달리아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거짓말이라도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같았다. 여기서 그를 몰아붙여서 진실을 알아낸다 해 봐야 자신이 부서지고 말 것이다.
달리아도 이게 고작 기억이 남기고 간 파편적인 자국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응, 응, 브리택, 알았어요….”
그의 옷깃을 붙잡고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보다 더 끔찍한 과거를 마주해야만 하는 자신의 숙명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그에게.
한참이 지나서 조금은 진정될 무렵, 브리택이 그녀의 눈물로 젖어 퉁퉁 부은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우리 달리아, 울고 나서도 예쁘니까 걱정 뚝.”
“…나 어린애 아니라니까요.”
훌쩍이며 그런 말을 해봐야 브리택에게는 요만큼도 통하지 않았다.
“어린애처럼 나한테 안겨서 울먹인건 어떻게 생각하고?”
“그건, 그건…약점을 잡다니 치사해요.”
브리택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먼저 침대에서 내려와 코트를 입었다.
“출발 안 해?”
그는 커튼을 걷었고, 내리쬐는 아침햇살에 다시 커다란 늑대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달리아는 괜히 툴툴거리며 내려왔다.
“먼저 나가 있어요. 난 옷 갈아입고 나갈테니까. 브리택은 옷 안갈아입어도 돼서 좋겠네요.”
“그거 비꼰거지?”
달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또 괜히 촉은 좋았다.
“내일 밤에 두고 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는 미소만 남기고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달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