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달리아의 말을 들은 브리택은 천천히 황무지를 걸어갔다. 저 등 뒤로 보랏빛의 결계 기둥이 조금씩 멀어지며 작아져갔다.
“일단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보이는군.”
“저도 일단은 느껴지는게 없어요.”
눈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친다면 브리택의 시야가 달리아보다 넓었고, 게다가 더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위협도 있기 마련이었다. 머스그레이브에서 수십 수백의 영혼을 다루며 깨우쳐진 달리아의 감각은 본능적으로 영혼의 존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얼른 쉴 만한 곳으로 갔으면 좋겠어요.”
달리아가 칼을 등 뒤로 집어넣곤 고글을 올리고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어린 양의 가죽으로 만든 지도에는 머스그레이브 영지로부터 수도인 얀데노르 왕성까지의 경로가 붉은 선으로 그려져있었다.
“정말이지…살아있는 것들이 드물군.”
브리택의 말이 옳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가 몰아치는 죽은 황무지. 도시를 보호하는 사제들이나 머스그레이브와 같은 몇 안되는 묘지기의 힘을 빌리지 못한 영지는 전부 페허로 변해갔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있잖아요.”
“…그래.”
비록 달리아는 보지 못하겠지만, 브리택은 미소짓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저 멀리 말라붙은 거목 하나가 보였다. 그 밑에서 잠시 쉬어가도 될 것 같았다.
“조금 쉬다 갈까, 달리아?”
“역시 제가 좀 무겁죠?”
달리아가 농을 던졌고, 둘은 킬킬대며 웃었다. 사실 네 시간을 연신 걸었으니 지칠 만도 했다. 달랑 그녀 하나만 태우고 걸었다면 또 모를까, 그의 안장에는 무거운 짐가방이 두 개나 있었다.
“안 무겁다니까. 한 번 더 점프해볼까?”
“…제발 그건 참아줘요.”
달리아가 바르르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브리택은 천천히 거목 앞까지 걸어갔고, 달리아는 벨트의 고리를 풀고 거목에 기대어 앉았다. 옆에 지팡이와 선조의 장검을 내려놓자 브리택이 가만히 그녀의 옆에 배를 깔고 누워선 그 커다란 머리를 달리아의 쭉 뻗은 다리 위에 올렸다.
“브리택.”
“말해.”
“나 이렇게 멀리 나온 건 처음이에요.”
달리아의 작고 흰 손가락이 그의 머리를 살살 긁어주었다. 그는 만족스러운지 눈을 가만히 감았다. 달리아는 아무래도 그가 정말로 사람이었는지를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너 또 내가 늑대개라고 생각하고 있지.”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라니까.”
그가 달리아의 작은 손을 그대로 물었다. 이빨로 문 게 아니라, 입으로 살짝 물었다. 그리고 축축한 혀로 마구 핥았다.
“흐악…!”
달리아는 기겁을 하며 그의 입에서 손을 빼냈다.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누렇게 바싹 마른 잔디에 손을 닦아내곤, 그의 코에 꿀밤을 먹였다.
“…이건 너무했어요.”
“미안….”
그의 눈꼬리가 축 늘어지는 걸 봐선 제법 미안해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달리아는 다시 그의 머리 위에 손을 턱 올렸다.
“…나 조금만 눈 붙여도 돼요?”
“얼마든지.”
묘지기는 영혼의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각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마치 그녀를 머스그레이브 저택의 지하에 있는 것만 같은 피곤함에 휩싸이게 했다. 아직 달리아는 묘지기 4년차였다. 조금 더 훈련이 필요했다.
“그럼…부탁할게요.”
달리아는 말라붙은 거목에 잠시 기대어 잠들었다. 피곤함과 노곤함이 몰려들었다. 온몸을 비 내리기 전 먹구름처럼 무겁게 적셨다.
-
꿈 속이었다. 달리아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렸을 적의 자신이 제 눈앞에 서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장면들이 아니었다.
제 눈앞에는 스무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열 다섯도 되기 전인 것 같았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자, 어린 자신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소년은 금발이었고,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매력적이었다.
그가 다시 어린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 달리아 머스그레이브. 네가 좋아.
어린 시절의 자신은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소년의 뒤에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나와 자신을 검은 마차로 끌고갔다. 아버지인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는 그 모습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소년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자신이 분명 무어라고 외쳤다.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 멀리 검은 왕좌터에서 그녀의 호출에 은십자가의 결계를 뚫고 나온 한 무리의 검은 영혼들이 그 소년을 붙잡았다는 것이었다.
온 사방에 비명이 가득찼다. 소년은 그대로 끌려갔고, 달리아는 걷어차인 것처럼 꿈 속에서 튀어나왔다.
-
달리아가 잠에서 깬 것은 기괴한 비명소리 때문이었다. 그건 악령이 되어 되살아난 망자의 울음소리였다. 달리아는 눈을 번쩍 떴고, 이내 입을 틀어막았다.
거목의 주변에는 검게 말라붙은 악령의 시체가 가득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무엇에 꿰뚫린 것처럼 머리가 박살나있었다.
“…달리아, 깼구나. 미안.”
브리택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새까맣고 커다란 가시가 아직 살아있는 마지막 악령의 가슴팍을 커다랗게 꿰뚫고 있었다.
“전부 머리부터 날려서 소리를 못 지르게 하려고 했는데….”
달리아는 감탄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가 자신을 지키겠다고 말은 하지만, 정말 그럴 힘이 있을지는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널브러진 악령의 시체만 열일곱이었다.
“…브리택?”
“얘는 좀 발이 빠르더라고.”
그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가시는 하나가 아니었다. 다른 가시 두어 개가 더 솟구치더니, 녀석의 머리통을 그대로 관통해 터트려버렸다. 그 몸뚱이는 부르르 떨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어, 언제 그런걸….”
“머스그레이브에서 이런 걸 쓸 일이 어디있어. 저번의 타버린 공주님은 네가 비키라고 했었잖아.”
묘지기견에게는 서약한 묘지기의 요청이 최우선적이다. 아마도 그는 그녀가 칼을 가져다달라고 했던 것이 가장 최우선이었을것이다.
아무리 악령이 구천을 떠돌다 악귀가 되고, 악귀가 망집을 쌓아서 악마가 된다고 하지만 악령도 쉬이 부술 수 있는 존재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벌써 밤이었다.
“…브리택, 나 얼마나 잤어요?”
“글쎄. 난 내 등에 달린 회중시계를 볼 수는 없어서….”
달리아가 급히 브리택에게 달려가선 안장에 매달린 시계를 보았다. 아홉시였다. 오전 늦게 출발했고 네 시간은 넘게 걸었으니 대충 다섯 시간은 잔 꼴이었다.
“…왜 안 깨웠어요.”
“너무 잘 자길래….”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축 늘어진 시체를 멀리 던져버리곤, 달리아의 옆으로 돌아왔다. 그의 윤기나는 검은 털에는 피 한 방울이 안 묻어있었다. 그녀의 옆에 누워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안장과 가방만이 잔디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좀 더 잘래?”
“…다 잤거든요.”
말은 그렇게 해도, 제 옆에 앉은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잠은 안 와도 이렇게 그와 함께 있는 것은 언제나 좋았다.
“다 잤다면서?”
“안 자요. 자는 거 아니에요.”
브리택이 킬킬대며 웃었다.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고, 귀를 조물거렸다. 달리아는 조금은 간지러운 기분에 살짝 미소지었다.
“내 귀가 그렇게 좋아요?”
“음, 뭔가 작고 보드랍잖아. 말랑말랑하고.”
그건 조금은 재미있는 대답이었다. 달리아는 벌떡 일어나선 그의 다리 위에 앉았다. 그를 마주한 채로. 그의 무릎 위에 앉자 조금은 앉은 키가 비슷해지는 것 같았다.
저 멀리 구름 너머로 달빛이 여전히 깨끗한 빛으로 황무지를 비추었다.
“브리택, 언젠가 내가 기억을 다 찾으면…나랑 사귈래요?”
“…지금은 사귀는 게 아니고?”
달리아가 빙긋이 웃으며 그의 몸에 제 몸을 포개어 기댔다. 그의 귀에 속삭였다.
“지금은 브리택이 날 짝사랑하고 있는 거잖아요. 난 한 번도 사랑한다고 안 했는데?”
브리택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거야 그렇네. 약속한거다?”
달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턱이 브리택의 어깨를 꾹꾹 눌렀다. 그는 가만히 손을 들어선 달리아의 자그마한 등을 쓸어내렸다. 망토 안에 입은 블라우스는 얇은 실크였고, 달리아의 등이 거의 그대로 만져졌다.
“…응, 약속할게요.”
브리택은 이 약속이 의미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기억만 모두 되찾는다면, 굳이 이런 약속까지 하지 않았어도 되었다는 것을 알 터였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약속의 말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브리택은 장단을 맞추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잠드는 거 아니야?”
그녀의 몸은 제 몸에 닿기에는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달리아는 그의 몸이 제가 기대기에 충분히 단단하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든 브리택의 눈가에 말라붙은 고목의 나뭇가지들이 보였다.
“무슨 소리에요. 아까 몇 시간을 잤는데. 우리 얼른 또 출발해야해요. 늦을라.”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브리택은 그런 그녀를 한 번 세게 껴안아주었다.
“흐윽.”
달리아의 작은 입술에서 숨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밀어내지도 않았고, 그 품 안에서 바동거리지도 않았다. 가만히 그의 포옹에 제 몸을 내주고 있었다.
“이제…갈까?”
“…좋아요.”
힘이 풀린 브리택의 팔이 달리아를 놓아주었다. 달리아는 가만히 몸을 일으켜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엷게 구불거리는 까만 머리칼, 그리고 방금 갓 갈은 칼날처럼 시리게 푸른 눈동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 아니에요.”
달리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혼을 쏙 빼놓고 볼건 또 뭐람. 달리아가 일어서려는 순간, 브리택이 그녀의 허리를 다시 감아 당겼다.
“…!”
그의 입술이 포개져왔다. 달리아는 어깨를 바짝 올렸다가, 다시 축 늘어뜨렸다. 조금은 까칠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깨우지 않겠답시고 힘을 쓰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윗입술이 제 입술 사이를 점하고, 아랫입술이 제 아랫입술 밑을 덮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선, 달리아의 목덜미에도 진하게 몇 번의 입맞춤을 한 후에야 그는 만족한 것 같았다.
“…후으.”
달리아는 바르르 떨던 몸을 다시 그에게 풀썩 기댔다. 브리택은 싱긋 웃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느낌이 너무 묘하단 말이에요.”
“그건 기분이 좋다고 하는 거야.”
“…나도 기분좋은게 뭔지는 알고 있거든요?”
단순히 기분이 좋다와는 조금 달랐다. 가슴 한쪽이 저릿하게 설레었다. 달리아는 숨을 조금 몰아쉬다가, 이번에야말로 다시 일어섰다.
“이제 가야겠어요.”
브리택은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그 굉장히 커다랗고 잘생긴 늑대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야?”
“일단 그셀바 영지에요. 여기서 그나마 가장 가깝기도 하고, 무엇보다 가장 최근에 교류해서 아직 살아있을 확률이 높아요. 저쪽의 저 빛 기둥이에요.”
빛 기둥이 남아있다고 해서 다 살아있는 도시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예외는 정말이지 적었다. 달리아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저 멀리에서 빛이 뿜어져 올라오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 같긴 하네.”
달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납작하게 엎드린 브리택에게 안장을 다시 채웠다. 안장에서 짐가방을 분리하고 채운 다음에 다시 짐가방을 매달아놓으면 좀 할만하긴 했다.
“안 무거워?”
“그렇다고 해서 브리택이 할 수 있는건 또 아니잖아요?”
달리아는 안장의 짐가방에서 조그마한 가죽 물통 하나와 육포 하나를 꺼내 입을 달래며 말했다.
“브리택도 조금 먹을래요?”
“난 됐어. 안 먹고 안 마셔도 난 문제없거든. 굳이 네가 다 먹어도 되는 걸 뺏고 싶진 않아.”
달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같이 저녁을 먹고 싶다고 굳이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던 사람이 누군데. 그래도 그의 따뜻한 마음은 고마웠다.
“그럼 같이 식사하는 건 그셀바에 도착해서 하는 걸로 해요. 괜찮죠?”
브리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아는 그런 그의 안장 위에 올라탔다. 올린 고글을 다시 내려 쓰진 않았다. 그가 빠르게 달릴 때만 써도 충분했다. 고글을 쓰면 시야가 조금 가려져서 다소 답답해지는 탓도 있었다.
“아참, 근데 브리택. 혹시 있잖아요… 원래는 금발이었어요?”
브리택이 코웃음을 쳤다.
“아니. 사람 머리카락 색깔이 갑자기 바뀌는 주문이라도 있나? 난 태어날 때부터 까만 머리에 푸른 눈동자였어.”
“하긴, 그건 그렇죠. 흠….”
달리아가 가만히 턱을 괴었다. 브리택은 어느새 출발해선 저 멀리 그셀바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왜?”
“아, 아니에요. 꿈을 꿨는데…황금색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나왔거든요. 어렸던 저한테 좋아한다고 말하길래 혹시 브리택이었나 싶었어요.”
그가 갑자기 딱 멈춰섰다. 그리곤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 새끼 누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