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달리아는 늘 일찍 일어났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묘지를 한 번 둘러보려면 그래야만 했다. 솔직히 그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한 번 죽은 영혼인 브리택은 잠을 잘 필요가 없었다.
밤새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새근거리는 작은 숨소리, 곱게 감은 눈, 입술 틈으로 흘러나오는 엷은 호흡까지.
가만히 그녀의 뺨을 어루만져주기도 하고, 뒤척일 때마다 엉기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빗어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행복한 건 지금, 그녀를 깨우는 일이었다.
“달리아?”
“흐응, 으앙, 조금 더 잘래요….”
브리택은 이미 멎었다가 이제야 다시 뛰는 제 심장이 또 멎을 뻔한 기분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 달리아…?”
브리택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달리아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끌어안곤, 그의 목덜미에 코와 입술을 부볐다. 브리택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 여신님 맙소사….’
늘 상상만 했었다. 한없는 그리움으로 이런 시절이 올 것이라며 꿈만 꾸었다. 실제로 제 품에 안겨오는 그녀는 제 상상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고, 배는 더 보드라웠고,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향긋했다.
“조금 더 잘래…?”
“네에….”
가만히 달리아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더 있었을까. 그녀가 눈을 느릿하게 떴다. 그리곤 제 앞에서 빤히 저를 지켜보는 브리택과 마주했다.
“으, 악!”
파르르 떠는 달리아가 침대 밖으로 떨어지려 하자, 브리택이 그녀를 낚아채선 떨어지지 않게 끌어당겼다.
“노, 노, 놀랐잖아요!”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깨워도 안 일어나놓곤.”
“…제가요?”
브리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외투를 입었다.
“아침순찰 안 나갈거야?”
생각해보니 이제 슬슬 나가야 할 때였다. 곧 낮의 해가 뜰 것이고, 머리를 빗으려면 한참은 걸릴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녀가 일어나서 제 엉긴 머리를 풀려고 할 때, 손가락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머리카락이 안 엉켜있어…?’
달리아가 조금은 놀란 눈동자로 제 머리칼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 뒤척일 때마다 빗어놔서 그래.”
“…브리택, 안 잤어요?”
“아, 아냐. 잤어.”
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거짓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왜.”
“거짓말해서 그렇죠.”
“누가?”
달리아가 손가락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브리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곤 쏘아붙였다.
“한 번 죽었다가 일어난 내가 잠을 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또 그렇네요.”
달리아는 납득했고, 브리택은 먼저 방문을 나갔다.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녀가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끔 배려해 준 것이었다. 달리아는 얼른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별다른 유별난 옷은 아니었고, 블라우스에 루프타이, 그리고 가슴 밑까지 올려입는 허릿단이 높은 검은색 치마였다. 팔뚝에 났던 얇은 상처는 어느새 나아있었다.
코트걸이에서 끝이 헤진 까만 양털 망토를 꺼내 입고, 기대놓은 은촛대지팡이를 들었다. 가볍게 지팡이를 휘둘러 불꽃을 피워올리면서 방문을 밀고 나가자, 그가 이미 사라져있었다. 아마도 뒷문 앞에서 달리아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거 참, 발도 빨라.”
달리아는 킥킥거리면서 계단을 쪼르르 내려갔다. 그녀의 예상처럼 그는 이미 뒷문 앞에 주저앉아선 달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브리택?”
“아니, 한 이 분 정도?”
달리아가 앞장서자 그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선 발걸음을 맞추었다. 달리아가 은촛대지팡이를 이리저리 흔들자 묘비 사이의 까만 것들이 다시 제 묫자리로 돌아갔다.
“오늘도 별일 없을 것 같긴 하네요.”
“그래도 너무 방심하진 마.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게 묘지잖아.”
그건 맞는 말이었다. 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이라도 챙겨올까요?”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이 만연했고, 브리택은 제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기는 커녕 농담을 던지는 달리아를 가늘게 뜬 눈으로 쏘아보았다.
“농담 아니야.”
“…아, 알았어요. 그렇게 무섭게 쏘아볼 건 뭐람.”
하지만 달리아는 굳이 그 장검을 가지러 돌아가진 않았다. 사실 이 아침은 영혼들이 활동하기에 가장 좋지 못한 시간대였다. 굳이 장검까지 필요하진 않았다.
“그냥 가요. 뭔 일 안생긴다니까요?”
“…그렇기에 하겠지만.”
브리택은 분명 무언가의 불길하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그건 분명 자신과 그녀 둘 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일 터였다.
달리아의 말은 일단 옳았다. 묘지 순찰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리택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시 돌아왔을 때, 저택 앞에는 커다란 마차가 와 있었다.
새까만 깃발을 단 검은색 마차였다. 달리아는 저 마차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그리고 그 검은 깃발의 뜻도.
“달리아, 저게 무슨….”
“새로이 묻히실 분이에요. 검은 깃발은 부고를 뜻하니까요.”
문제는 마차였다. 황금색 테를 두른 검은색 마차를 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땅에 몇 명 되지 않았다. 달리아가 품 속에서 새하얀 면장갑을 찾아 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누구시오?”
마차를 지키던 근위병이 창을 겨누었다. 달리아가 지팡이를 내밀어 흔들며 말했다.
“머스그레이브의 의무를 짊어진 여든 한 번째 은촛대, 묘지기 달리아 머스그레이브입니다. 혹시 저 마차는….”
“…머스그레이브 양이셨군요. 맞습니다. 왕가의 귀중한 혈통께서 또 한 명 돌아가셨습니다.”
달리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수도에서요…?”
“예. 부친께서는 달리아 머스그레이브 양께 이 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가두어야’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과연 그랬다. 마차 안에는 관이 있을 터였는데, 일단 마차의 문마저 찢어진 성경의 페이지로 봉해져 있었다. 사제들의 솜씨는 아니었다. 그들이라면 성경을 북북 뜯어서 봉인용으로 사용할 생각을 하지도 못하리라.
그녀의 아버지, 아브라함 머스그레이브의 솜씨였다.
“가둬야 한다니…일단 알겠습니다. 오랜 길 오시느라 수고스러우셨을텐데, 집사께 말씀을 전해드릴테니 빈 방에라도 하나 잡아 쉬고 계세요.”
“따뜻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희는 마차가 인도되는 대로 바로 가보아야 합니다.”
달리아는 눈살을 찌푸리곤 저택 쪽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왔으면 집사가 가장 먼저 달려와 있었을텐데, 오코넬 집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송구스럽게도 저희 저택의 집사가 늦는군요….”
“마차만 제대로 인도된다면 괜찮습니다. 그보다 이쪽은….”
그의 눈빛이 압도적인 크기의 늑대개인 브리택을 향했다.
“아,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제 묘지기견, 브리택입니다.”
“…묘지기분들은 언제나 알 수 없군요.”
달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저희야 중앙에서 좀 떨어진 채로 사니까요.”
“그래도 머스그레이브 공동묘지에서 별다른 일이 없는 걸 보면, 머스그레이브 일가의 묘지기 분들은 존경받아 마땅하신 분들입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달리아는 얼떨떨하게 웃었다. 사실 이런 감사인사를 받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마차가 심하게 흔들린 건 그 때였다.
— 머스그레이브….
달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브리택에게 눈을 흘겼고, 그는 대번에 달리아의 마음을 알아챘다. 브리택은 저택 쪽으로 망설임 없이 내달렸다.
“달리아 양?”
“기사님, 이리 오세요.”
달리아는 기사에게 손을 뻗은 채로 천천히,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기사는 마차가 다시 요동치자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달리아의 말에 따랐다.
— 머스…그레이브….
마차 안에서 무언가가 콰직 하고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망자가 관을 깨고 나오는 소리였다. 왕실의 관이라면 분명 오래 묵은 떡갈나무로 만들테고, 그건 제아무리 강력한 망자라고 해서 저렇게 과자 부수듯 부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무엇을 보내신거죠…?”
달리아는 기사에게서 대답이 없자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검과 지팡이라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가 정원에 울려퍼졌다.
“무, 무슨…!”
기사가 검을 뽑아 달리아를 내려치고 있었다. 달리아는 잽싸게 뒤로 굴렀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죠?”
“모르고 죽어야 네가 망자로 일어났을 때 우리가 안전하지 않겠나?”
달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기사가 검을 고쳐쥐었다. 마차는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이 안에 든 건…살해당한 공주 소에린 얀데홀스의 원혼이다. 과연 네가 나와 이 ‘타죽은 공주’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기사는 투구를 벗어 그녀에게 던졌다. 달리아의 몸은 생각보다 재빨라서, 가볍게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기사의 머리는…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괴하고 검게 말라붙은 망자의 것이었다.
“…다시 묻겠어요. 당신은 누구고, 어디에서 왔으며, 누가 보냈지요?”
그는 대답 대신 다시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가 덤벼들 무렵, 선조의 장검을 입에 문 브리택이 녀석을 들이받아선 마차 방향으로 튕겨버렸다.
“달리아!”
“브리택, 칼이요!”
그가 바닥에 물고 왔던 검을 떨어뜨렸고, 달리아는 지체없이 그것을 잡아들었다. 브리택이 어찌나 세게 들이받았던지 마차가 반쯤 박살나있었다.
— 머스…그레이브…!
박살난 마차의 잔해 사이에서 길고 기괴한, 검게 탄 팔이 불쑥 솟아나왔다. 저 공간 안에서 어떻게 저 길이와 크기의 팔이 튀어나올 수 있는지를 의뭉스러워해봐야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달리아, 괜찮겠어…?”
이 모든 상황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 자신이 위험했고, 이 모든 묘지의 안위가 위험했다. 묘지기로서 죽은 원혼을 향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의 달리아는 그걸 하고도 남을 만큼의 힘이 있었다.
“…걱정 말아요, 브리택.”
그것의 이름은 ‘타죽은 공주’가 더없이 어울렸다. 긴 팔을 휘두르며 자신이 담겨있던 마차를 깨부순 망자 기사를 씹어먹었다. 머리가 비정상적으로 컸고, 몸은 공주였던 시절의 몸처럼 길고 그을린 드레스를 입은 채 까맣게 말라붙어있었다.
— 머스그레이브!!!!
그리고 무엇보다 머스그레이브에 크나큰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달리아는 일단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그녀가 지팡이를 세워서 바닥을 두 번 두드리자, 은촛대지팡이의 촛불이 횃불만한 크기로 그 덩치를 키웠다. 주변이 따스한 흰 빛으로 가득 찼다.
“나, 묘지기 달리아 머스그레이브는 여든 한 번째의 짐을 기꺼이 짊어진 의무자로서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답변은 없었다.
— 머스…그레이브!!!!
오로지 울분에 찬 외침뿐이었다. 브리택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의 낮은 으르렁거림이 명백한 위협을 쏘아보냈다.
“나, 묘지기 달리아 머스그레이브는 여든 한 번째의 짐을 기꺼이 짊어진 의무자로서 두 번째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녀가 기괴하고 날카로운 두 팔을 마구 휘두르자 정원의 꽃들이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불길한 바람이 날카롭게 휘몰아쳤다. 그녀의 비정상적으로 부푼 머리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달리아!”
브리택이 외쳤다. 하지만 달리아는 묘지기로서 반드시 해야 할 절차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나, 묘지기 달리아 머스그레이브는 여든 한 번째의 짐을 기꺼이 짊어진 의무자로서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은 어떻게 죽었습니까!”
달리아가 다시금 바닥을 내리찍으며 비명처럼 외쳤다. 그녀의 은촛대지팡이에서 마치 태양처럼 밝은 빛이 눈부시게 퍼지기 시작했다. 불꽃이 아니라 그것은 빛 그 자체였다.
— 머스그레이브…!!!
하지만 그녀의 원념은 너무나도 강력했고, 은촛대지팡이의 유례없이 강력한 따스함도 그 날아간 이성을 다시 붙잡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비켜요, 브리택!”
달리아의 단호하고 날카로운 외침에 브리택은 바로 비켜섰고, 달리아는 지팡이와 검을 바꿔 잡았다. 왼손에 잡은 은촛대지팡이의 불꽃을 선조의 장검에 가져다 대자, 날에 새하얀 불꽃이 휘감겼다.
— 죽어!!!!!
타죽은 공주는 매서운 속도로 튀어올랐고, 달리아의 바로 머리 위를 노리곤 쏘아져내려왔다. 달리아는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브리택은 그녀가 흘리는 눈물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은 나의 부족함으로서 도래하나니, 나는 섭리에 따라 그대를 베면서도 영구히 참회할 것을 나의 불꽃에 맹세합니다….”
달리아가 힘껏 검을 당겨올리곤, 그대로 허공을 베었다. 새하얀 궤적이 가로새겨지더니, 타죽은 공주의 검은 몸은 그대로 반으로 갈라졌다. 쿵, 쿵, 달리아의 양 옆으로 떨어져 몇 번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침묵했다.
아니, 침묵한 줄만 알았다.
— 머스그레이브… 머스그레이브를 원망한다… 머스그레이브를… 우리를 모두 죽인….
그게 그녀의 마지막 전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