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요?”
“아악!”
기세 좋게 일어난 것이 민망하게도, 나는 또다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서리 씨!”
놀라 손을 내밀어오는 이는 홍수연이었다. 다행히 이번에 보인 것은 헛것이 아니었나 보다. 내 어깨를 잡는 느낌이 생생한 걸 보니. 그러나 한 번 놀란 가슴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터라, 어깨를 잡는 손길에 흠칫 놀란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서리 씨...? 괜찮아요?”
내 안색을 살피는 홍수연의 눈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제야 때늦은 부끄러움이 치고 올라왔다. 게다가 느닷없이 사람을 보고 소리 지르는 행동은 자칫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혹시 모를 오해를 풀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급히 손사래를 치며 해명하기 시작했다.
“오, 오해하지 마세요! 수연 씨 얼굴을 보고 놀란 건 아니에요! 사실 아까 조금 놀랄 만한 일이 있어서…….”
“놀랄 만한 일이요?”
“네. 아, 아니요. 그냥 제 착각으로 헛것을 좀 봐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수연 씨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나 내 해명에 홍수연의 낯빛은 더욱 근심으로 어두워졌다. 열을 재듯 내 이마에 손을 짚고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서리 씨 몸이 많이 허해지신 것 같은데.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드릴까요?”
“아,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는 멀쩡해요! 아, 어쩌면 제가 어제 밤을 새워서 그랬나 봐요.”
“저런… 불면증까지 갖고 계신 건가요?”
“아니요!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홍수연의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갖은 해명을 해야만 했다. 물론 이런 나의 노력에도 그녀의 얼굴에 찬 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 주제로 계속 이야기를 끌어 가봐야 홍수연의 걱정만 더 늘리는 꼴이 될 것 같았다.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 그나저나 제 방은 어떻게 오신 건가요?”
“그러고 보니 제 용건을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두 분 다 아직 아침 식사를 안 하셨으니까, 같이 하자 말씀드리려고 내려왔어요.”
홍수연이 웃으며 말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에는 어제 보았던 미심쩍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어제 겪은 기이한 경험들은 쓸데없이 겁 많은 성격과 의심이 빚어낸 착각이었나 보다. 오늘 보았던 헛것처럼 말이다. 하긴 어제 온종일 피곤했던 몸 상태에 계약이라는 큰 이벤트를 앞두고 긴장까지 했으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에 걸렸던 모든 의구심이 마치 빠진 퍼즐이 맞춰지듯 딱딱 맞아 들어갔다.
“죄송해요, 수연 씨. 괜한 심려를 끼쳐드렸네요.”
“아니에요. 몸은 좀 안정이 됐나요? 오늘 아침은 샐러드 바로 준비했는데 혹시 속이 불편하시면 죽이라도-”
“아니요, 괜찮습니다!”
후다닥 몸을 일으켜 내가 멀쩡하다는 걸 어필했다. 내 노력이 가상했는지 홍수연은 그제야 근심을 떨쳐버리고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안내를 따라 2층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챙겨온 한소을은 다행히 어제 일에 대한 앙금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대신 여전히 잠이 덜 깬 듯 눈을 느리게 껌벅이고 있었다.
“뭐야, 한소을. 왜 이렇게 얼굴이 퀭해. 너도 밤새 잠 못 잤냐?”
“…….”
“하긴 첫날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잠자리에 예민하면 아무래도 잠을 좀 설칠 수밖에 없지.”
한소을은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수시로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내심 고소했다. 이 자식, 남의 잠을 설치게 한 대가를 톡톡히 받았군. 잠을 설친 게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었다.
나란히 하품을 하며 구내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은 2층에 있어 홍수연의 방에서 보았던 고층 특유의 도심 전경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 또다시 감탄이 나왔다.
“우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 통유리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본다면 경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으음? 오늘 아침은 시리얼이 아닌가.”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감상 따윈 개나 준 녀석은 샐러드 바에 대한 평도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이렇게 호텔 뷔페에 버금가는 샐러드 바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니. 이제 보니 이 녀석은 미식가가 아닌 편식가였던 모양이다. 풍성히 차려진 만찬 앞에서 시리얼이나 찾고 있는 걸 보니. 녀석은 지난 아침에 내가 말아준 시리얼에 대해 어떤 깊은 인상이 남았던 게 분명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줄 때 감사히 먹으라는 내 말에 한소을은 군소리 없이 접시를 들었다. 얌전히 바 앞에 서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살피더니, 그대로 따라 한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또 마음이 짠했다. 나도 뷔페에 처음 갔을 때 저랬었지 싶어서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것도 맛있어. 먹어 봐.”
자기 취향이랄 것 없이 아무렇게나 음식을 쌓고 있는 녀석의 접시에 오일 파스타가 담긴 그릇 하나가 추가되었다. 순순히 받아드는 걸 보며 미식 탐험에 탄력을 붙였다. 이 녀석이 먹을 만한 게 없을까 둘러보는 내 눈에 연어와 참치가 눈에 띄었다. 두툼하게 썰어낸 살코기는 얼핏 봐도 신선하고 탱글탱글했다. 가끔 무한리필집에서 먹었던 냉동 고기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녀석의 빈곤한 식문화에 교양 한 줌을 더해줄 요량으로 그릇을 채웠다.
“자. 이것도 먹어 봐.”
연어와 참치를 쌓아 올린 조그만 그릇을 막 접시 위에 얹어주었을 때였다. 뒤에서 날 부르는 홍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리 씨 잠시만요.”
“아, 네!”
“소을 씨는 저와 같은 채식주의자라 회 종류는 드시지 않을 거예요.”
“엇… 정말요?”
흘끔 한소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회를 쌓아 올린 그릇을 내 접시 위에 올려주며 담담히 말했다.
“나는 동물의 살은 먹지 않는다.”
“아… 미안해……. 몰랐어.”
“괜찮다.”
다행히 나의 무지한 행동에 대해 녀석은 그리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대신 내 쪽에서 나서기가 껄끄러워진 탓에 미식 탐험은 그대로 끝이 났다.
음식 몇 가지를 더 접시에 담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외에 몇 사람이 더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소라엔터의 소속 연예인 한 명과 서너 명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쪽을 보고 있는 내 시선을 느낀 홍수연이 부연설명을 했다.
“아, 스케줄 마치고 이제 막 왔나 보네요.”
“와… 조금 신기하네요. 연예인이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요.”
“그런가요? 저희 소속 아티스트랑 직원들은 여기서 곧잘 식사해요. 굳이 저희 사옥 밥 놔두고 외부음식 먹기 싫다나. 저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여기서 식사하는 편이에요.”
그 말을 듣고 나니 한낱 구내식당 밥이 왜 이리도 뛰어나다 못해 호화로울 정도인지 납득되었다. 무려 기획사 대표가, 그것도 입이 짧아 밥 한 번 먹이기 힘든 사람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니 음식의 질이 올라갈 수밖에. 음식 수준이 홍수연에게 맞춰져 있다 보니, 함께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직원과 연예인들이 덩달아 수혜를 입는 구조였다. 회사의 자산이 넉넉하기에 가능한 구조이기도 했다.
“저는 얻어먹는 입장이라 그저 감사할 뿐인데 식비를 부담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비용 고민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서리 씨 말이 맞아요. 저희 회사는 다른 기획사들에 비해 식대 지출이 많은 편이에요. 그래도 다행히 비용 절감을 위한 방법은 있었답니다.”
“우와, 어떻게요?”
“글쎄요. 한 번 서리 씨가 맞혀볼래요?”
“으음…….”
고민에 빠진 나를 잠시 지켜보던 홍수연이 말을 덧붙였다.
“힌트를 하나 드리자면 여기 건물이 원래 레지던스였다는 것 정도?”
으응? 그게 식비와 무슨 연관이 있-
“아...! 그렇군요! 여기가 본래 SR 그룹에서 운영하던 레지던스였으니까, 기존 운영방식을 고스란히 이어받았겠군요.”
“그렇죠. 제가 독립을 해 세운 회사라고는 하지만, 비용을 절감할 방법을 굳이 피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SR 그룹의 계열사 같은 거로군요.”
“네. 저희 회사는 신생 기업이에요. 온전히 자립하기에는 아직 미숙하죠. 그래서 저희 기획사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홍소라 회장님의 전폭적인 후원을 등에 업고 성장하고 있어요. 그래도 덕분에 다른 독자적인 기획사들보다 더 저렴하게 식자재를 납품받을 수 있고, 직원들도 SR에 소속되어 있을 때와 동일한 수준의 급여와 복지를 받고 있죠.”
홍수연의 설명이 끝나자, 그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한소을이 무심하게 툭 말했다.
“그렇다는 건 SR 그룹의 깊은 간섭을 받을 수도 있다는 소리군.”
“맞아요. 그런데 그게 어때서요?”
“맞아, 한소을. 기회가 되니 도움을 받는 것뿐인데 뭐가 나빠.”
“나는 그게 나쁘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이 걸고넘어진 사실이 시비가 아니라고 해명한 녀석은 입을 꾹 다물었다. 또 나왔다, 저 버릇. 어제 알았지만 한소을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들거나 심기가 상할 때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하, 짜식이 애기도 아니고. 내가 홍수연의 편을 들어서 기분이 나쁜 건가? 그렇게 녀석의 의중을 알지 못한 채로 식사를 마쳤다.
“그럼 서리 씨,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생각해둔 건 있어요?”
차는 자신의 방에 가서 마시자는 홍수연의 말에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후식답게 입안을 상큼하게 해줄 유자민트티를 내왔다. 차를 홀짝이며 이 방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그녀가 물어온 질문이 그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제가 수연 씨에게 감사한 것은, 소라엔터테인먼트의 모든 인력과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게 허락해주신 점이었어요. 아무리 옥석 같은 인재가 있어도 그 사람을 발굴하고 키워줄 만한 능력이 없으면 재능을 꽃피우기가 힘든 일이니까요. 자신의 노력으로 어렵게 데뷔를 한다고 하더라도 톱스타의 자리까지 올라가기 어렵죠. 저는 그래 봐야 겨우 연예계에 발끝만 담근 수준이지만……. 그런데도 안정적인 회사와 좋은 시스템을 만나지 못해 엎드러진 사람들을 여럿 봤어요. 많이, 너무 많이요.”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게 시스템과 유능한 인력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계약을 완수하기까지 소라엔터테인먼트의 모든 자본과 인력과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게 지원을 약속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미 기반이 잘 다져졌으니 제가 해야 할 일의 방향은 분명해졌어요.”
“그렇다는 건...?”
“네. 사람을 구할 거예요.”
창밖으로 보이는 복잡한 도심의 전경을 결연하게 바라보았다.
이곳에, 아니 이곳 너머까지. 그 어딘가 내가 찾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캐스팅을 시작할 거예요. 그리고 소라엔터테인먼트 주관으로 오디션을 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