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지금부턴 우리끼리만 쇼핑하러 갈 거니까.”
“쇼핑이요?!”
기함한 내가 다시 물으니 홍소라가 고갤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수연이는 다 좋은데 쇼핑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물욕 자체가 별로 없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 내가 수연이랑 다른 건 다 같이 해도 쇼핑만큼은 다른 사람이랑 해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서리 씨가 같이 가줘요. 혹시 오늘 바쁜 일 있는 거 아니지?”
“그, 그럼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빼야죠!”
“고마워요.”
홍소라가 기분 좋게 웃으며 푹신한 좌석 시트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앞 좌석 등받이에 달린 테이블을 펼치고는 그 위에 태블릿PC를 올려두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이렇듯 이동하는 순간에도 짬짬이 업무를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멋있어 보였다. 느긋하고 여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언론에 비친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포함해 누가 봐도 선망할 만한 멋진 인물이었다.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얹어 그녀를 마음속 롤모델로 삼았다.
깊은 산길을 벗어나고 한산한 시골길을 지나 어느덧 도심지에 다다랐다. 지금까지 조용히 운전만 하고 있던 기사님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회장님, 어느 백화점으로 갈까요?”
“다성백화점으로 가죠.”
차는 점점 더 복잡한 도심지 한가운데로 향했다. 시가지를 가로질러 중심으로 향할수록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점점 눈에 띄었다. 번화가답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수도 부쩍 늘어나 북적거렸다. 고적했던 산속 풍경과는 대조된 모습에 마치 다른 세계에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곧 얼마 안 가 도심의 풍경이 눈에 익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민준이 쇼핑이며 유흥을 즐기기 위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동네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곧 어색함을 떨쳐버리고 시가지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서울 도심답게 번잡한 도로 위를 느릿하게 유영하던 차는 어느새 조그만 건물 앞에 세워졌다. 높이 솟은 신축 건물들 사이로 낡고 아담한 건물 하나가 빼꼼히 고갤 내밀고 있었다. 심지어 외관은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빛이 바랜 느낌이었다. 그것은 세련됨으로 무장한 도심의 풍경에 조화되지 못하고 저 혼자 과거의 모습에 머물러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낡고 풍화된 건물을 향해 혀를 차거나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다성백화점의 본점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외관에서 드러나는 근본 있는 역사에 이곳을 출입하는 고객들은 나름의 자부심마저 느끼곤 했다.
나는 홍소라를 흘끔 보고는 멋쩍게 눈을 깜박였다. 이 동네 온갖 곳에 발 도장을 찍고 다녔던 오민준도 본점만큼은 발을 들여 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은 VIP 카드가 없으면 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성백화점 본점에 왔다는 건 그녀가 VIP 회원이라는 뜻이겠지.
“내릴까요?”
“네, 네!”
홍소라를 따라 1층 로비에 들어섰다. 출입구를 지나면서도 카드를 제시하라는 직원들의 고압적인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깍듯하게 허릴 수그리는 인사가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이 곧 출입증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로비의 절반을 막 넘어서기 무섭게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 직원 한 명이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바짝 조여 가꾼 그는 백화점을 출입하는 VIP 고객들의 쇼핑을 돕는 큐레이터였다.
“회장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응, 요즘 좀 바빴어.”
“안 그래도 이번에 또 새로 개업하신 해외지사들 관리하시느라 한참 바쁘시겠다 싶었습니다.”
“그래. 아 참, 말 나오니까 생각난 건데 개업식 때 꽃이랑 선물 보내줘서 고마워. 경황이 없어서 따로 인사를 못했네.“
“아닙니다, 회장님. 말씀만으로도 감사하죠.”
그녀의 말에 잠깐 고갤 갸웃했다. 언론에 비친 대로라면 그녀는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대충 흘려 넘기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개업식과 같은 중요한 행사에 보내온 꽃과 선물들은 함께 일하는 동업자나 경쟁자, 거래처 등 중요한 인맥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인데, 그 중요한 기회를 홍소라가 놓칠 리 없었다. 분명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다가 답례를 따로 했을 텐데.
그럼에도 이 남자가 따로 인사나 답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홍소라에게 있어 그런 인사치레 따위 할 필요조차 없는, 한 마디로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는 모양인지 별로 씁쓸한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자신의 주 업무로 끌어감으로써 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이번 달에 보내드린 카탈로그에서 일부 품목이 들어왔는데 보여드릴까요?”
“아니, 집으로 보내줘요. 오늘은 이 아가씨 옷 좀 보려고 온 거니까.”
홍소라는 남자의 계략에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고 내 등을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그러자 지금껏 나는 안중에도 없이 홍소라에게만 줄곧 못 박혀 있던 직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의 신세가 변하는 순간이었다.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을 뜨듯 훑어본 직원의 미간에 희미한 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직원은 프로답게 활짝 웃어 보이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머! 여기 계신 아름다운 숙녀분은 누구...?”
“응. 내 둘째 딸”
직원의 호들갑에 담담하게 받아친 홍소라의 말에 나는 살짝 움찔했다. 이런 상황은 매우 어색했다. 이렇듯 누군가가 나더러 자기 자식이라고 소개하는 상황을 겪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자식으로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그녀의 말에 잠시 감상적으로 되려던 것도 잠시, 또다시 들려오는 직원의 경망스러운 말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장님께 수연 아가씨 말고 또 다른 따님이 있었나요?”
“응. 수연이 친구야. 둘이 자매 같이 가까워서 내 둘째 딸 삼으려고. 예쁘지?”
“어쩜! 회장님은 농담도 수준급이시네요!”
아, 그렇지. 농담이라는 것도 깜빡 잊고 순간 진지해질 뻔 했다. 나는 서둘러 감정을 갈무리하고는 직원의 호들갑에 맞춰 마주 웃었다.
“이 아가씨 나이대에 어울리는 가방이랑 구두, 코트 좀 골라줘요. 너무 단정한 것보다는 센스가 돋보이는 걸로.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맡겨만 주십시오!”
“서리 양, 나는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오래 걸으면 좀 피곤해요. 먼저 라운지에 가서 쉬고 있을 테니 마 실장이랑 쇼핑 끝나면 오세요.”
홍소라는 그 말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말은 쉬겠다고는 했지만 태블릿PC를 챙겨 들고 간 것을 보니 또다시 업무를 볼 생각인가 보다. 역시 한 기업을 이끌어가는 수장의 삶은 잠시간의 쉼도 용납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겁이 났다.
“아까 회장님이 서리 양이라고 부르던데, 아가씨 이름이 서리에요?”
“아, 네. 은서리입니다.”
고맙게도 직원, 마 실장님이 또다시 집중력을 흐트러뜨려준 덕분에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얼떨결에 이름 소개를 마친 난 예의상 마 실장님의 이름도 여쭤보았다. 아니, 여쭤보려 했다.
“실장님 성함은…….”
말을 채 마치기 전에 눈길이 그의 가슴팍에 달린 명함으로 향했다. 마봉구.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그의 매끈하고 세련된 외모와 지극히 동떨어진 구수한 이름에 입을 합 다물었다. 언뜻 보면 마포구 같기도 하고 꽤나 놀림 많이 받았을 법한 이름을 보며 나는 결심했다. 절대 그에게 이름을 묻거나 부르지 않기로.
“흠흠… 그럼 1층에 있는 가방부터 둘러보죠, 서리 씨”
마봉구는 내가 더이상 이름을 묻지 않자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를 따라서 1층 매장부터 부지런히 돌았다. 1층 매장은 그야말로 별세계에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놀라운 것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깨끗하게 리모델링하여 지극히 세련되고 화려한 모습을 자랑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백화점 1층이 명품매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매장이라기보다는 예술품의 전시장에 가깝게 조성된 분위기는 눈앞이 핑핑 돌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히 본점의 명성에 마땅한 아름다움이었다.
“본점이라 그런지 다른 곳에선 못 보던 브랜드도 좀 있는 것 같아요.”
“본점은 모든 다성백화점 명품 매장에 제품이 배치되기 전에 가장 먼저 수입 판매되는 곳이니까요. 여기서 먼저 판매 가치가 있는지 테스트해 보고 반응이 좋으면 다른 지점들에도 매장을 내는 거죠.”
나름 오민준을 따라다니며 브랜드 이름들을 눈에 익혀뒀다고 생각했는데, 생소한 이름의 브랜드들이 눈에 띄었다. 조금 실험정신이 빛나는 디자인의 매장들도 있었는데 평범한 소시민으로서는 선뜻 도전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마봉구는 일단은 걸쳐봐야 자신의 취향을 알 수 있다면서 전혀 거리낌 없이 매장들을 드나들었다.
1층은 주로 가방들이 많이 있었다. 크고 작은 가방들이 마치 전시된 예술작품처럼 벽면과 테이블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신줏단지를 모시듯 소중히 다뤄진 모습을 보며, 문득 내 방 한쪽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가방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고풍스러운 매장 분위기도 별천지였으나 가방에 달린 택에 적힌 가격은 더욱더 별천지였다.
“자, 이걸로 갑시다.”
“어억… 이거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도대체 0이 몇 개야. 너무 놀라서 0의 개수를 세어보는 내 모습을 직원들이 신기한 것 보듯 쳐다보았다. 이곳을 찾는 고객 중에 이렇게 택에 적힌 가격을 살피는 인간을 처음 본 게 분명했다.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마봉구가 내 촌스러운 행동을 타박했다.
“여기서 가격 택 확인하는 건 서리 씨가 처음이야. 창피한 행동 그만하고 빨리 따라와요.”
그는 서둘러 나를 이끌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딱히 결제도 하지 않았는데도 바로 물건을 집어 들고나왔다.
“계산 안 했는데 괜찮아요?”
“그러게요. 제가 누구 전담 큐레이터죠?”
“아…….”
생각해 보니 그는 홍소라의 전담 큐레이터였다. 마봉구의 얼굴이 곧 그녀의 신용카드나 다름없었다. 아무 말 없이 물건을 집어 들고나오더라도 저절로 홍소라의 신용카드에서 결제가 되는 시스템인가 보다.
“고객 중에는 카드를 꺼내서 계산하는 행동 자체가 품위 없다고 느끼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예를 들어 홍소라 회장님 같은...?”
“정답”
으음… 그렇구나. 나 같은 범인(凡人)은 범접하기 어려운 사고방식인데.
마봉구는 처음엔 몇 번 내 의견을 물으며 취향을 맞춰 가는가 싶더니, 결국 내가 물건을 보는 안목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주도권을 가져갔다. 나는 물 위에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마봉구가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휩쓸려갈 뿐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만으로도 심히 피곤해졌다는 사실이다.
“마 실장님 좀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구두 하나만 더 보고요.”
마봉구는 정작 당사자인 나보다 더 의욕적으로 매장을 돌고 있었다. 이자는 어떻게든 내 몸을 감고 있는 촌스러운 패션에서 구제해 주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 있었다. 기어이 매장 하나에서 구두 하나를 더 신어보고 난 뒤에야 마봉구의 마수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서리 씨 뭐 마실래요?”
“저는 라떼로 부탁드려요.”
지친 나머지 아무 카페나 눈에 띄는 곳으로 들어갔다. 각자 음료를 하나씩 손에 들고서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앉으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종일 걷고 구두를 종류별로 신었다 벗은 발은 퉁퉁 부어있었다.
“아이고야…….”
“힘들죠? 쇼핑도 쉬운 게 아니라니까.”
진이 다 빠진 나에 비해 마봉구는 전혀 지친 기색 없이 쌩쌩해 보였다. 과연 이자에게 쇼핑이란 천직인 모양이다. 나는 오랜 격전 끝에 겨우 얻어낸 전리품인 쇼핑백 두 개를 지친 눈길로 둘러보았다. 겨우 가방 하나, 구두 하나를 얻었다.
“이제 코트 하나만 남았네요.”
겨우 코트 하나라는 듯이 어깰 으쓱하는 그를 해쓱한 얼굴로 마주 보았다. 또다시 수십 개의 매장을 둘러볼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 실장님은… 정말 쇼핑을 즐기시는군요.”
“그럼요. 이게 제 직업이니까요. 물론 자기는 더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상대니까 의욕이 불탄 것도 있지만.”
“네?
“내가 여기 다성백화점 본점으로 승진해 온 지도 5년인데, 지금껏 본 고객 중에 이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엉망진창인 사람은 처음 봤거든.”
“아… 하하, 그렇군요. 제가 좀 그런 방면으로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긴 하죠.”
“자자, 그럼 도전정신을 마저 불태우러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