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씨, 거머리 같은 놈에게 잘못 걸려서 여기서 수장치를 뻔했네'
손에 잡히기만 하면 한 대 후려쳐야 속이 후련할 것 같은데 위쪽으로 떨어져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꼬라지를 보니 그건 글렀다.
내 생각이라도 읽은건가? 언제 저기까지 올라갔대?
꼬라지를 보니 내가 호수 밖으로 나갈 자세만 취해도 바로 공격해올 것 같은데 이걸 어쩐다.
"아 씨, 이거 이러면 나가린데"
[민호, 마동력이 점점 약해져 간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알겠어요. 일단 숨 좀 돌리구요"
그란죠의 재촉이 아니더라도 나도 몸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진다.
저 위에 있는 찰거머리에게서 벗어났는데도 이런거면 이 호수가 원인이라는 건데
그러데 내가 기억하기로 그란죠가 물에 들어갔다고 해서 특별히 약해졌다라는 설정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확실하지 않으니 일단은 저놈이 이 호수에다가 무슨 짓을 해놨다고 생각하고 움직여야겠어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일단 여길 나가야 한다는건데"
생각과 함께 거머리를 바라보니 지느러미나 물 갈퀴 같은 게 여기저기 달려있는 모습이 보인다.
딱 봐도 물속에서 움직이기 유리한 파츠같은데 저거
음.... 헤엄으로 저 녀석을 따돌리는 건 불가능할 것 같으니 패스하자.
마찬가지로 다가가서 싸우는 것도 영 내가 불리할 것 같으니 넘어가고
이것저것 다 생각해봐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네?
외부에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내 자력 구제는 솔직히 가능성이 낮을 거 같은데?
[민호, 저곳을 봐라]
객관적으로 조목조목 따져가며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질 뻔했는데 타이밍 좋게 들린 동굴 아저씨 목소리 덕에 자칫 하면 자살할 위험을 피했다.
웬일로 이 아저씨가 도움이 될 때가 있네?
흔치 않은 일에 신기해하며 눈을 돌리니 위쪽으로 새로 생겨난 시야 홀이 보인다.
그리고 시야 홀에 비치는 낮익은 문양을 확인하자마자 지체 없이 몸을 돌려 호수 바닥으로 향했다.
[민호, 어디를 가는거냐? 그쪽은 호수 안쪽이다]
알아요.
알아서 이쪽으로 향하는 겁니다.
내 행동이 예상 외였는지 지느러미 자식도 잠깐 멈칫하더니 곧 나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게 보인다.
나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녀석이 굳이 공격을 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만 두고 움직이는 걸 보니 놈도 내가 힘이 점점 빠지고 있다는 걸 안다는 건데
역시 녀석이 여기다 뭘 해 놓은 건가?
그래서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으시다?
딱 악당의 전형적인 컨셉이네
방심하다가 한방에 처 발리는 역할 말야
[어디까지 가는 거냐 민호. 더 이상 내려가면 도움을 받는 게 쉽지 않을 거다]
"괜찮아요. 지금은 확실하게 하는 게 더 좋아요"
쿵
호수 밑바닥까지 도착해서 땅에 발을 디디니 확실히 몸에 조금 힘이 돋는다.
확실히 물에다가 무슨 짓을 한 모양이네.
하긴 아직 시나리오 초반인데 공간 자체에다가 수작질을 부릴 정도로 스케일이 커지면 나중에는 감당이 안되겠지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민호]
이 동굴 아저씨의 목소리가 왠지 초조하게 들리는 건 내 기분탓인가?
"어쩌긴 뭘 어째요.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저놈 잡아야죠"
고개를 들어 내 위에 떠있는 지느러미 자식을 노려봤다.
성인이 된 지금에서 생각하는 건데 왜 주인공들은 필살기를 마지막까지 남겨뒀다가 쓸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만화 분량도 있고 스토리의 재미를 위해서라는 건 이해하지만 막상 주인공이 된 내 입장에서는 굳이 마지막까지 몰리다가 역전하는 흐름이 내키지 않거든.
막말로 상대에도 나 같은 놈이 있어서 변칙적으로 움직여대면 매번 실수 없이 역전승한다는 보장이 없잖아?
고로 저번 용이의 각성 때와 같이 스토리 상 어쩔 수 없는 위기가 아니면 기회가 있을 때 바로바로 부숴버리는 게 최고다.
바로 지금처럼
[마법의 발현의지 확인. 마법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의지를 일으키자 주변의 움직임이 느려지며 색이 사라진다.
동시에 내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
‘사용한다!’
[사용하고자 하는 대상을 선택해주세요. 대상에게 시선을 고정한 후 마법진을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로 선택이 가능합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이 물속에서 녀석에서 직접적으로 마법을 쓰는 건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거다.
그래서 이번에도 내가 마법을 사용할 대상은 녀석이 아니다.
대상은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 자체, 발 밑에 있는 땅의 단단함을 느끼며 마법을 대상을 지정했다.
[사용하고자 하는 마법의 분류를 지정해 주세요. 마법의 분류는 전용마법, 강화 마법, 방어 마법, 기본,...]
내가 직접 사용한 건 기본 마법 중에 염력뿐이지만 대충 다른 마법들의 종류도 알고는 있다.
따로 공부한 건 아니고 이동 중에 메이 할멈이 강의를 해댄 부작용이랄까?
내가 자고 있어도 끝이 나지 않는 마법 강의 덕분에 평소 불신 하던 수면 학습법에 대한 신뢰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전용 마법을 사용한다'
[전용 마법 사용 확인, 현재 능력으로 사용 가능한 전용 마법은 에너지 볼트와 어스 드래곤이 있습니다.]
둘 다 들어본 적이 있는 마법이다.
각각의 특징과 사용 방법이 많았던 것 같은데 새겨들은 게 아니라 기억이 또렷하진 않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쓰기 좋은 마법을 고를 정도의 지식은 있는 정도?
‘어스 드레곤 선택’
[어스 드래곤 사용의지 확인. 사용자의 능력이 낮아 발현되는 마법의 질과 양이 하락합니다]
이건 예상했던 일이고
[마법을 시전합니다. 생성되는 마법진을 시간 안에 따라 그리세요. 마법진의 난이도는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띠링~!
..............
..........야
........잠깐만...
....너 일로 나와봐
..지금 이걸 나보고 그리라고 보낸거냐?
쓸데없이 경쾌한 소리와 함께 눈 앞에 나타난 마법진의 모습은 내 머리 만한 미러볼이었다.
미러볼의 미러 하나하나가 다 다른 도형을 하고 있는 미러볼
미러볼에 미러가 몇 개가 있더라…
10
설상가상 미러볼 위쪽에 숫자가 보인다.
뻘건 궁서체로 된 숫자가
대략 18포인트 정도 되는 크기의....
뭔가 장난이 아닌 진심 100%라고 시위하는 것 같은데
9
에라
너 일단 나중에 두고 보자
내가 능력치가 차이가 나면 얼마나 난다고 난이도 차이가 이 지랄이야!
8
세세한 디테일은 포기하자.
저번에 보니까 대충 비슷하면 보정도 되는 것 같던데
삐
얄짤없네
정도껏 비슷하지 않으면 보정이고 뭐고 틀린 선이 지워지네
7
OK!
우선 외곽선이랑 내부 미러볼 경계선은 완성! 이제 미러볼 도형만 일일이 그리면 되는구나
........OK는 개뿔
6
아놔 마법진에 원근법을 왜 구현해 놓은 건데?
그냥 같은 사이즈로 표시하면 되지 왜 일일이 크기를 다르게 해놨냐고
이거 일부러 나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지?
5
삐
아 뭐야?
왜?
6각형 맞잖아?
어?
야 이 미친놈들아 누가 마법진에 7각형을 넣어!
4
아 이거 이제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하라는거야
스마트폰처럼 이렇게 하면 확대라도 되게 응?
아, 이거 스마트폰처럼 확대가 되는 거였네
3
아 씨발
나이 들어서 하지 않던 욕이 저절로 나오네
내가 무슨 유,초딩 포도송이 색칠 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없던 환 공포증도 생기겠다 미친놈들아!
2
씨발
이렇게 했는데 실패하면 진짜 다 뒤지는거야
어? 분명히 말했어?
리스크고 뭐고 다 좆까라 그러고 그냥 뒤저버릴거야 엉?
1
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
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
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
씨발씨발씨발
다했다!
진짜 아슬아슬했다
버저비터였다고!
이거 진짜 보통 근성이었으면 중간에 때려치웠다 진짜
[마법진을 판별합니다]
......왠지 내 말을 끊은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인데 이자식?
그리고 저번에는 판별 같은 거 안 했잖아?
츠츠츳
막 메시지 창에다가 욕을 하려는 찰나 내가 그려놨던 마법진이 빛을 내며 기존의 미러볼
도안처럼 보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그려 놓은 선들이 물에 퍼져 있는 미역처럼 흐물거리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건 이미 한번 보았는데 그래도 신기하네
잠시 뒤 보정이 끝난 마법진의 크기가 줄어들며 나에게 다가왔다.
이전에도 한번 겪어 보았던 일이어서 저번처럼 허둥대지 않고 자연스레 손으로 쥐었더니 머리속에 마법의 사용 방법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마법의 구현에 성공하셨습니다. 이 이후로 해당 마법진의 구현 단계는 생략됩니다]
그것참 다행이네.
쓸 때 마다 매번 이런 지랄 맞은 도형을 그릴 거면 차라리 안 썼을 테니까
손에 들려 있는 마법진을 보고 있는데 동굴 아저씨의 음성이 들린다.
[민호, 벌써 대지의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것인가?]
그란죠는 땅과 불의 마동왕. (그런데 왜 만화 이름이 번개 전사였던거지?)
때문에 그란죠의 전용 마법은 땅과 불의 마법이 주류다.... 라고 메이 할멈이 자주 말했었지
"이제 겨우 흉내만 내는거에요"
겸양이 아니라 정말 흉내만 낸 거다.
마법진의 난이도를 보면 진짜 저건 실패하라고 나온 문제 같았으니까
그 말은 원래 지금 내 실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소리인데 이걸 억지로 했으니 실력이 제대로 나올리가 없다.
'구현이나 될라나 모르겠네'
[어쩔 생각이냐 민호. 지금의 네가 대지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칭찬할만 하지만 지금의 그 마법으로는 적을 물리칠 수 없다]
우와
물리칠 수 없데
날려 버린다거나 죽여버리는 것도 아니고 무려 물리칠 수 없데
무슨 조선시대 학당에 온 줄?
성균관대 사이버 학당 교수세요?
진짜 이 아동 만화 언어 필터링은 해도 해도 적응이 안된다.
"...아 네. 저도 이걸로 저놈을 물.리.칠.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 어쩔 생각이냐 민호, 네 마동력이 많이 약해지고 있다]
뭐 그거야 억지로 되도 않는 마법을 썼으니 몸에 무리가 당연히 온 거고
지금도 어지럽고 졸려 죽겠다.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리다니? 뭘 말이냐?]
아따 거 아저씨 말 참 많네
그냥 뭘? 이렇게 물어보면 될 걸, 말 참 길게도 한다.
"저거요"
말 만하면 또 물어볼 거 같아서 친절히 손을 들어 위를 가리키기까지 했다.
그런 내 손짓에 그란죠뿐만 아니라 내 위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던 지느러미도 무심코 내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내 손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이제 막 변신이 끝나 호수로 들어오고 있는 포세이돈이 있었다.
아까 그란죠가 알려준 게 막 팽이로 포세이돈 소환 마법진을 그리고 있던 제롬이었거든
그나저나 지느러미 너, 뒤도 돌아보고 꽤 여유 있다?
내가 기다리던 게 포세이돈이 맞긴 한데 그렇다고 니가 지금 그걸 보고 있을 정도로 팔자가 좋은 게 아닐텐데?
"도마, 키사, 라문"
내 주문에 손에 들려 있던 마법진의 빛이 폭사하는 것과 동시에 또다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아래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녀석이 움찔하는 게 슬로우로 보이지만 이미 늦었다는거~
남은 주문을 마저 외우며 마법진을 땅에 박았다..
"나와라 어스 드래곤"
.........아씨 쪽팔려.....
나이 30이 넘어서 이런 중딩들도 안 할 짓을 하고 있으니
내 입으로 무려 주문을 읊다니.
아 수치사 할 것 같아
콰직!
처참한 내 기분은 신경 안 쓴다느 듯이 마법진이 들어간 곳을 중심으로 땅이 갈라졌다.
조금씩 갈라지던 균열이 지느러미가 있는 방향으로 길어지더니 곧 그 안에서 돌로 만들어진 용이 튀어나왔다.
그래 용이 튀어나와야 했다
.......
....
..
잠깐만, 저게 용이라고?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으로 인해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내 입장에서 보면 저건 용이라기 보단...
음.... 뭐랄까.... 장어?
아니 그것도 좋게 봐준거고 조금 크게 자란 미꾸라지나 물 미역으로 보이는데....
몸통은 얇고 길이는 내 팔 만한 게 화살 같기도 하고....
심지어 한 마리다.
.....야 아무리 수준 미달이 억지로 만들어 낸거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영 미덥지 못한 모습이라 떨떠름하 게 보고 있는데 다 소환된 녀석이 지느러미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