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목소리의 정체
‘갑자기 존댓말? 어제는 시끄럽다고 소리지르더니. 푸하하하하 근데 귀신이라닛!!!’
“그럼 대체 누구신지.. 자꾸 말을 하면서 따라다니는 거예요? 나쁜사람..분은..아닌듯한데..”
‘기억이 안나시나 보군..’
“내가 당신을 언제 봤다고..본건 아니지..여튼 언제 들었다고 기억이 나겠어요.
대체 누구세요?”
‘나 말고 다른 소리는 들은적 있을텐데..여튼.. 정식으로 소개 할께. 나 가디언 홍이라고 해.’
“…가디언이라구요? 무슨 가디언?”
‘뜻을 모르는거야? 너를 지키는 가디언 앤젤 홍이라고.’
“앤젤? 뭐야 수호천사 같은거란 말이예요?”
‘그렇다고 해두지.’
“그렇다고 해둔다는건 무슨 뜻인지?”
‘흠흠.. 너무 따지지 말라구. 가디언 앤젤은 맞는데..’
‘맞긴 한데 이를테면 인턴 가디언입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건 다른 목소리인 것 같은데..”
‘전 가디언 홍의 사수 가디언 앤젤 진이라고 해요.’
“이때까지는 홍의 목소리만 들렸는데요.”
‘저는 지금까지는 지켜보고 있었던거죠.’
“가디언 앤젤 같은거면 뭐든 다 소원 같은거 들어주고 그런거 아니예요?”
‘하하하하 아니 무슨 가디언이 램프의 요정인줄 아나..’
‘홍. 그만 무례하게 굴어.. 인턴 기간이 길어 질 수도..’
‘넵! 가디언 진님.’
녀석은 가디언 진이 말하자 드디어 조용해졌다.
하린은 이 상황이 너무 웃기고 놀랍고도 어이가 없었다.
‘저희는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임무가 아닙니다.’
“그럼 뭘 하는거죠?”
‘지켜드리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보호의 역할이지요.’
“저를 보호하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아니 여태까지 나타나지 않다가 왜 갑자기..”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여하튼.. 지금 당신이 저희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또한 흔히 있는 일은 아닙니다. 너무 귀가 좋으셔서.. 사실 사고 때문에 더 좋아지게 되셔서.. 주파수가 다른 저희 목소리까지 들리게 된 겁니다.’
원래 하린은 귀가 밝은 편이었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아주 사소한 소리까지 하린은 잘 들을 수 있는 편이긴 했다. 그래서 모른척해야 할 상황이 더 많았다.
그렇지만 오토바이 사고 이후 소리에 대해 더욱 예민해졌던 것을 떠올렸다.
하린은 사고 이후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강아지가 차 밖에서 짖는 것도 아니고 신음 소리 비슷하게 내는 소리를 하린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제 회의실에서 조그맣게 혼자 중얼거리는 조미나씨의 말도 하린에게는 굉장히 분명하게 들렸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럼..그 사고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신의 청각이 굉장히 발달하고 보통 인간과 다른 뇌의 부분이 건드려졌어요. 저희 목소리까지 듣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군요..그래서 그렇게 시끄럽게..”
‘시끄럽긴 누가 시끄러워! 내가 며칠간 너를 몇번이나 구했는지 알기는..’
‘그만하게 홍.’
‘네..’
하린은 홍의 반응이 웃겼다. 아무래도 저쪽도 엄청난 상하관계가 있나보다.
‘여튼.. 하린씨. 당신은 지금 우리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계속 홍이 말하는 것이 들리는게 이상하겠지만 다른 인간들과 있을 때는 반응을 자제해 주시고요. 그리고 홍은 지금 수습 가디언으로 2개월간 당신과 같이 있을겁니다. 일종의 테스트이지요.’
“보호가 필요하다는게 무슨 뜻인지..?”
‘더 이상 자세하게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린 보호자인 가디언일 뿐이지 미래를 알려주거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저희 임무가 아닙니다.’
딱 잘라서 말하는 가디언 진의 말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왜 목소리만 들리는 거죠? 얼굴이나.. 뭐 형체 같은 것은 없나요?”
‘그것도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일단 목소리만 들으실 수 있는 상태라고만 알아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것이 없었다.
“비밀이 많네요.”
‘이건 비밀이 아니라 우리 업무 규칙이라고!’
가디언 홍이 참지 못하고 거들었다.
험험..
바로 가디언 진의 기침소리가 이어졌다.
보이지 않아도 소리만으로도 둘의 관계와 상황을 이해 할 수 있었다.
하린은 이 상황이 황당하면서도 웃겼다.
‘그리고 저는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홍이 당신과 함께 있을 겁니다.’
“아..어딜 가셔야 하나요?”
침묵이 이어졌다.
홍이 말을 거들고 싶었겠지만 가디언 진이 막은 것이리라.
어쨌든 누군가 24시간 자신을 지켜준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며칠간 그 목소리 덕을 조금 보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홍과 이야기 하시면 됩니다. 홍도 인턴 가디언이지만 저희 규칙과 보호 방법등은 모두 숙지하고 있습니다.’
“네..그러죠.”
‘그럼 전 이만.’
그 말을 마친 가디언 진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그가 하린의 곁에서 사라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하린의 옆에는 가디언 홍만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
한동안 계속 된 침묵이 이어졌다.
하린은 다시 일에 집중했다.
내일은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이 있는 날이었다. 다시 하린은 아까 연습하던 부분부터 발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자신이 연습하는 것을 녹음하고 다시 들어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젠 자동차는 업계의 혁신적인 기능을 내놓아….”
‘너 몸 않좋아보여 잠을 좀 더 자.’
“잠을 좀 더 자…진짜.. 너 좀 진짜 쓸데없는 부분에서 끼어들지 좀 마! 엄청 헷갈리니까!”
하린은 녹음 버튼을 다시 눌렀다.
‘준비는 할만큼 했잖아. 그만 좀 쉬어 니 몸이 철로 만들어진 줄 알아?’
하린은 다시 녹음 버튼을 스탑했다.
“그게 지금 내 맘대로 되는 줄 알아! 지난번 사고 난 날도 팀장이 나 사고 나서 일 꼬인거라고 난리쳐서 이번 피티 성공 못하면 안되다고 얼마나 압박 했는데. 누가 잠이 않와서 안자는 줄 알아!”
하린은 평소 답지 않게 하고 싶던 말들을 쏟아내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이런건 편한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해보지 못한 말들을 그냥 편하게 해버렸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고, 듣는 이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디언 홍 뿐이니까.
‘예민하게 굴기는.’
“그냥 지금은 조용히해줘. 나를 지켜주는게 너 임무라면서!”
‘어차피 열심히 해봤자라구.’
홍은 한동안 더 중얼중얼 했다. 하린이 답이 없으니 그뒤에는 말이 없었다.
다음날 새벽이 되었다.
밤을 새며 발표 준비를 철저히 하고 거의 외우듯이 파워포인트 기획서를 보았다.
다음 페이지에 있는 것도 다 외울지경이었다.
새벽에 잠시 집에 들러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하린은 오늘은 기필코 광고주에게 컨펌을 받아야하는 것만 생각났다.
이번 건은 3년전 겨우 비딩(*bidding 광고주를 따내기 위해 광고대행사들의 경쟁적인 응찰을 일컬어 비딩이라 한다.)을 받아서 이어진 큰 광고주이다. 이번 건은 다음 계약이 걸린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이었다. 그리고 그쪽에서도 이번 광고의 결과로 내년 건을 계속 이어갈 것인지 결정하기로 되어있었다.
“휴..이제 준비는 다 되었고..”
‘눈에 다크서클 있어.’
“나도 알고 있다구. 이제 오늘 저녁은 집에 가서 푹 잘 수 있어!”
하린은 홍의 말을 막았다.
오전에 가볍게 회의를 마친 후 광고주가 있는 수원까지 하린과 팀장, 하린과 입사 동기인 김민석 대리까지 같이 차로 움직였다.
오전11시.
드디어 프리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이번 미팅에는 광고주 쪽인 G자동차 회사 담당 대리와 과장, 부장까지 참석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하린의 회사에서는 팀장과 하린, 김민석 과장이 자리했다.
하린과 김민석 과장이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하는데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어서와.”
팀장이 벌컥 열린 회의실 문을 보며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딱 맞춰왔네.”
더이상 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회의실 문 쪽을 바라본 하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신태민 감독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