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우연이 아니야
“대리님, 도하린 대리님!”
하린이 자동차 광고의 기획 회의를 다시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새로 들어 온지 얼마되지 않은 조미나씨가 하린을 급하게 불렀다.
“왜 무슨 일 있어요?”
“대리님, 어떻게 해요. 지난번에 우리 냉장고 광고 촬영했던거 재 촬영해야 된대요.”
“뭐라고요? 아니 왜요? 또 광고주가 뭐라고 했어요?”
“그게 아니라.. 제품 위치가 잘 못 놓였었다구.. 대리님 아프셔서 일찍 가신날 제가 대신 수정콘티 보내고 촬영장 갔었는데 메일 보낼 때 수정 전 콘티를 보내서 제품 위치를 바꿔서 찍었어요..어떻게 해요 대리님..”
얼굴은 완전히 울상이 되어서 하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린은 심호흡을 한번 했다.
마음 같아서는 욕을 한바가지 해주고 싶었지만 하린이 빠진 자리를 매꾸려다가 생긴 일이었다. 하린에게도 책임은 반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어요. 일단 팀장님께 내가 보고 드리도록 할거니까.. 근데 잘 못 찍은 컷에 모델도 걸려 있어요?”
“네..대리님 어떻게 해요. 저 엄청 잘 못한거죠..그날 제가 정신이 없어서 잠도 못자고.. 나갈때 이메일 보냈는데 착각해서…”
오마이.. 그 한 컷을 다시 찍으려면 얼마나 많은 돈과 사람과 시간이 드는 줄 아는지 모르는지..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일단 일을 수습하는게 중요했다.
“미나씨, 일단 상황 설명은 됐고. 나중에 나랑 다시 이야기 좀 해요. 그리고 스튜디오 연락해서 촬영 스케줄 다시 잡아주고.. 모델이랑은 내가 이야기할께요.”
일단 팀장님에게 알려야 했다.
지난번 자동차광고 프로젝트가 어그러져서 프로젝트 기간이 늘게 된 것도 팀장이 하린을 탓하던 참이었는데 업친데 덥친격으로 또 다시 일이 터졌다.
아무리 아래 직원의 잘 못이라지만 하린이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웠다.
“도대리, 지금 정신이 있어 없어! 안그러더니 왜그래 지난번부터!
신입인 조미나씨가 뭘 알아. 왜 아침부터 다치고 그래서 일을 다 엉망으로 만드는거야?
지금 그거 다시 찍으려면 스케줄이 얼마나 꼬이는지 알지! 그거 방송 언제야?”
예상은 했지만 팀장의 속사포같은 질타가 이어졌다.
‘아니 내가 사고가 나고 싶어서 그랬나. 오토바이가 치고 간걸 어떻게 하라구..’
하린은 마음을 가다듬고 팀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방송은 다음주입니다. 편집까지 계산하면….오늘 내로 수정 컷 찍어야 합니다.”
팀장은 변명하는 것을 싫어했다.
하린은 사무실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는 팀장의 질타를 그대로 들었다.
그 뒤에도 한 참을 팀장은 잔소리를 늘어놨지만 하린은 묵묵히 들어주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살짝 머리가 아파왔다.
“저.. 대리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야. 사수인 내가 빠져서 미나씨가 내 일을 대신 처리하다 생긴 사고니까. 그래도 다음부터 스튜디오 최종 건 넘기는 일은 꼭 나한테나, 오대리한테 확인 받고 넘기도록 부탁해.”
“그럼요!! 당연하죠!! 죄송해요!!”
‘으…병원 가기 전에 처리하고 갈걸..내 죄지 내 죄야..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신입한테 맡길 일이 아니었나..’
하린은 조금 편하게 가려 한 걸 후회했다.
“미나씨 스튜디오 스케줄 잡아줘요. 오늘 저녁 무조건 해야 한다고 대표님께 말하고. 오늘 못찍으면..휴.. 아니지. 일단 되는지 안되는지 확인 하고 그 뒷일은 이야기 하자구.”
“네! 대리님! 역시 대리님!! 너무 감사해요!”
미나씨가 다시 스튜디오에 연락해서 급하게 촬영 스케줄을 잡았다.
다행히 오늘 저녁 한타임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오케이.
모델에게는 하린이 따로 연락한다고 말하고 한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지나갔다.
‘다른 촬영 있나.’
“네. 한정우입니다.”
“정우야, 통화 괜찮아?”
“아무리 바빠도 우리 도하린 대리님 전화는 받아야지. 무슨일이야?”
한정우는 하린과 고등학교 친구이다.
하린과 수아, 정우는 셋이 자주 어울려 다녔다. 정우와 수아가 옆 집에 사는 사이였기 때문에 셋은 거의 매일 붙어 다니고 대학 시절에는 맛집 투어를 다니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우의 오랜 무명시절을 끝내준 것이 하린이였다.
정우는 3년전 광고 하나로 완전히 대박을 내고 스타덤에 올랐다.
하린이 전담해서 맡은 첫 광고였고, 이례적으로 2년차인 하린의 아이디어가 통과되어 광고가 나왔다.
독특한 컨셉의 광고였다.
그 광고에 오디션으로 정우를 밀어 붙인 것도 하린의 입김이 컸다.
유명하지 않지만 컨셉에 딱 맞다는 것을 강조했다.
정우는 의리가 있었다.
때때로 서브메인으로 들어가는 광고까지도 하린이 부탁하면 흔쾌히 들어주었다.
이제는 거의 톱스타 급인데도 불구하고.
“정우야, 진짜 미안한데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하린이 너가 부탁한다고 하면 나 불안한데.. 이번엔 또 무엇을 부탁하시려구. 하하..”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어? 오늘 저녁?”
“응!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 저녁에 바빠?”
평소 같으면 매니저를 통해서 이야기해도 될 일이었지만 이번일은 오늘 저녁에 무조건 찍어야 한다. 지금 하린의 머릿속에는 오늘 저녁 촬영을 무사히 마쳐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아니..갑자기 왠 저녁….밥 먹자구???”
전화기 저쪽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니 아니.. 내가 지금 촬영 생각만 하느라 앞 뒤 없이 시간 있냐고만 물어봤네. 그게 아니라, 사실은… “
자초지종을 설명한 하린의 말을 들은 정우 쪽 수화기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하… 뭐야. 난 또.. 니가 너무 진지 하게 시간 있냐고 물어봐서..저녁이라.. 잠시만..스케줄 좀 보고. 근데 공짜로는 안되겠는데. 그 부탁 들어주려면 나 오늘 저녁에 스케줄 있는거 바꿔야 하는데.”
“페이는 따로 나갈꺼야. 정우야 정말 고마워. 니가 날 살려주는구나!”
전화 통화를 하는 중이었지만 하린은 정말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페이 이야기는 아니구. 이건 오래한 광고고 처음있는 실수니까 따로 페이 받는 것 없이 그냥 찍을께. 대신 다음주에 나 밥 한번 사줘.”
“응??”
“방금 응이라고 했지? 그럼 오케이 한 걸로 알고 끊을께. 오늘 저녁 스튜디오에서 봐.”
전화가 끊겼다.
하린은 전화기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밥이라…뭐 밥 쯤이야 사야지.’
어깨를 으쓱한 하린은 어쨌든 큰 고비를 넘겼음에 감사했다.
정말 오늘 못 찍었다면 광고주에게 엄청난 욕을 먹음과 동시에 방송 스케줄까지 바꿔야하는 대형 사고가 날뻔했다.
한 숨을 돌린 하린은 남은 일을 마무리했다.
바쁘게 오후가 지나가고 하린은 짐을 챙겨 스튜디오로 향하면서 촬영 스케줄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오늘 스케줄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그리고 이 부분 촬영을 다시 해야지.’
하린은 차를 몰고 스튜디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손에는 캔커피와 간식이 잔뜩 들려있었다. 계속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지만
오늘은 너무 급하게 잡은 스케줄이다. 그리고 심지어 하린 쪽 실수였다.
스튜디오 대표도 오늘 건은 그냥 추가 촬영해주기로 했다.
그동안 하린이 쌓은 일에 대한 신뢰가 빛을 발하는 날이다.
스튜디오와 배우 모두 추가촬영에 오케이라니. 이런 일은 정말 흔하지 않았다.
어느 쪽에서건 펑크가 나게 마련인데. 하린은 오늘 스텝들을 위한 푸짐한 간식을 가지고 가고 있었다. 물론 식사는 따로 회사 쪽에서 제공하는 캐더링을 시켜 놓았다.
하린이 지하 스튜디오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누군가 내림 버튼을 눌렸다. 옆을 쳐다본 하린은 고개를 꺽어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스튜디오에 가는 모델인가 싶을 정도의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큰 키에 벌어진 어깨.
깔끔한 머리 스타일과 하얀색 티셔츠에 하늘색 남방.
그리고 베이지 면바지에 흰 스니커즈. 클래식.
흔한 패션이지만 큰 키와 몸 때문에 모델처럼 보였다.
띵동.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하린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남자도 같이 탔다.
남자가 하린이 가려고 하는 스튜디오 층을 눌렀다.
하린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같은 곳으로 가는 것 같은데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린은 살짝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그 남자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핸드폰으로 무엇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냥 모른척해도 되는 상황.
하린도 핸드폰을 보았다. 오늘 찍을 콘티를 다시 확인했다.
쿠궁!
“아악!”
“엇!”
그때였다. 갑자기 엘리베이터 불이 꺼지더니 엘리베이터가 멈춘 것이 아닌가.
하린의 몸이 흔들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괜찮아, 정전이야’
“네?”
어두컴컴한 엘리베이터 안.
하린은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혹시.. 후..흐흡..저한테 무슨 말 하지 않으셨나요?”
“아뇨..아무말도 안했습니다. 여기 비상버튼이..”
남자는 핸드폰 플래시를 켜서 비상버튼을 찾고 있었다.
‘정전이야. 금방 괜찮을 거야.’
또 그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하린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헉..어억…흑..’
핸드폰으로 비상버튼을 찾던 남자가 하린에게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숨..숨..이 잘 안 쉬어져요..”
남자는 갑자기 하린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세엣…
“아니…허헉…지금..흐.ㅂ…뭐 하시는 거예요!!”
하린은 자신의 옷을 벗기는 남자에게 놀라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이보세요. 숨을 그렇게 못 쉬는데 이렇게 꽉 끼는 셔츠를 입고 있으면 됩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숨 쉬는거 도와드리는 겁니다.”
‘괜찮아.’
그때였다. 다시 그 목소리가 하린을 안심시켰다.
“흐흡..제가 할께요…헉…휴..후..”
남자가 셔츠를 풀자 하린이 숨을 내쉬었다.
하린도 뭔가 조금 숨을 쉬기 편해 진 느낌이 들었다.
하린이 숨이 조금 고르게 쉬어지지 남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떨어져 있던 간식들을 종이봉투에서 비워서 바닥에 쏟았다.
그리고 빈 봉투에 공기를 넣어서 하린에게 주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핸드폰 불빛이 하린의 얼굴과 종이봉투를 비추고 있었다.
“허..억.. 흑..헉.. 이걸..왜....”
숨이 잘 쉬어 지지 않는 하린은 봉투를 쳐다 보았다.
남자는 봉투에 바람을 넣어서 하린에게 건네 주었다.
“이 안에 있는 공기를 마셔서 호흡 해봐요. 좀 나아질겁니다.”
페이퍼백.
숨을 잘 쉬지 못하는 하린에게 남자는 종이 봉투로 하린의 입과 코를 덮고 호흡을 하라고 했다.
‘숨을 크게 천천히 내쉬면서 또 들이마시고 하면 되. 봉투의 공기가 너의 호흡을 도와줄거야. 정전은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참아.’
몇번 숨을 내쉬던 하린은 조금씩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분명 이 남자가 말하지 않았는데.. 목소리가 다른데..아…’
하린은 머리가 아파왔다.
그때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왔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